[특파원수첩] 박찬호-정석 '따뜻한 우정쌓기'
기사입력 1998년 02월 16일 15시 15분
구름이 잔뜩 낀 플로리다주 베로비치의 다저타운 오전 9시.
훈련 시간이 아직 한시간은 남아 텅빈 운동장에 두명의 청년이 힘차게 잔디를 박차며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이제는 아무리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박찬호의 건장한 모습과 박찬호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의 가냘픈 체구를 연상시키는 정 석이었다.
멕시코만에서 밀려오고 있는 허리케인의 영향으로 바람마저 제법 거세게 부는 가운데 두 한국 청년은 묵묵히 어깨를 나란히 하며 운동장을 질주하고 있었다.
불과 1∼2년전만해도 꿈에 불과했던, 야구 최고봉이라는 미국 메이저리그의 한 구단에서 두명의 한국 선수가 나란히 달리고 있는 모습이 현실로 다가선 것이다.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선배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고, 정 석은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빨리 배워 나가려는 의지가 돋보여 절로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정 석은 "야구 동기인 찬호가 너무 많이 도와줘 힘든줄 모르겠다. 일일이 선수 및 코치들과 모두 인사를 시켜주고, 미리 정보를 알려주니 너무 편하다"고 고마움을 표현한다.
박찬호는 "아무도 주위에 없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어서 내가 겪어야만했던 시행 착오들을 정 석이가 다시 겪게 하고 싶지는 않다"며 "너무 열심히 하니까 걱정은 되지 않는다"며 선배의 넉넉함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옆방에 자리를 잡은 이들은 저녁이면 모여 박찬호의 경험담을 듣고, 정 석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산교육의 장을 만들어가고 있다.
스프링 트레이닝 첫날인 15일 `코리아 특급' 박찬호는 지난 5년간 늘 그랬듯이 아침에 홀로 운동장을 뛰었고, 이튿날인 16일 제2의 `코리아 돌풍'을 노리는 정 석이 달리기에 합류했다.
모든 사람이 놀랄 정도로 열심히 영어를 습득한 박찬호는 정 석에게 야구외에 영어 전수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박찬호는 간단한 숙어들과 야구 관련 용어들을 틈날 때마다 알려주고 있으며, 정 석은 그것들을 곧바로 실생활에 적용, 코치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있다.
16일 내야 땅볼 처리 연습을 하면서 `내가 잡을게（I got it！）'를 크게 외치며 박찬호가 공을 처리하자 바로 뒤를 따른 정 석이 더 큰 목소리로 `I got it！'을 외쳐 코치들과 동료들은 웃음짓게 하기도 했다.
운동이 끝난 뒤 당구를 함께 친 이들이 모두 왼손으로 당구를 치며 오른팔을 보호하는 모습도 이채로웠지만 서로 양보하는 모습도 상큼한 우정을 느끼게했다.
25세 동갑내기지만 이미 메이저리그의 스타로 올라선 선배 박찬호와 이제 마이너리그 생활을 시작하려는 후배 정 석.
두 한국 청년들이 어떤 신화를 엮어낼지 궁금하기만 하다.
[베로비치（미플로리다주）＝민훈기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