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청춘일기] (3)김종환
기사입력 1998년 02월 15일 15시 16분
친구의 빚은 집을 넘기는 걸로는 부족했다. 나머지는 또 노래를 불러 갚는 수밖에 없었다.
이후 5년간 다시 돈을 모았다. 지하철과 버스를 바꿔타며 야간업소를 뛰어다닌 결과 겨우 850만원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동안 만들어둔 노래들을 가지고 후배 녹음실을 찾았다. 컴퓨터 반주를 사용해 한번에 녹음을 마쳤다. 마스터링까지 다 끝낸 CD알을 보자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민해경씨 곡작업을 내게 의뢰했던 애플 레코드 이명순 사장을 무작정 찾아갔다. 96년초였다. 노래를 듣고 난 이사장은 "도저히 안되겠다"고 거절했다. 내 자식(장가만 일찍 갔더라면) 또래의 10대 댄스그룹들이 막 쏟아져 나올 때였다.
사실 어떤 제작자라도 선뜻 홍보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어떻게 만든 앨범인데, 몇년을 기다려 온 건데. 며칠을 고민했다. 방송국이 아니라도 홍보할 곳이 있을 것 같았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 바로 시장이었다.
남대문과 동대문 새벽시장 중 DJ박스가 있는 곳은 모두 17군데. 예전 동료 선배 DJ를 찾아다니며 판을 돌렸다. 새벽시장 역시 성격상 빠른 노래를 주로 튼다. 따라서 피크 때가 아닌 파장 무렵인 새벽 3시경에 내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존재의 이유'였다.
그때부터 야간업소를 마치고 난 뒤면 어김없이 시장을 돌았다. 귤 사과 캔커피 등을 들고 매일 눈도장을 찍었다. DJ박스문을 노크한 뒤 멋쩍게 사과 한알을 밀어넣으며 "김종환입니다"라고 말하는 게 다였지만. 절대적인 도움이 됐던 DJ들은 그런 인간적인 모습에 열심히 음악을 틀었다 한다.
가식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가서면 그 어떤 이의 마음도 녹일 수 있는 법이다.
그렇게 한달을 새벽시장에 출근하다 그만 덜컥 병이 나버렸다. 일주일을 꼼짝못하고 누워있는데 삐삐가 왔다. "오늘 저녁 꼭 나와보라"는 한 DJ의 메시지였다. 자정이 넘은 시간. 시장은 불야성이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을 뚫고 지나는 순간, 문득 귀를 잡아끄는 소리가 있었다.
"저녁 늦게 나는 잠이 들었지∼" 바로 내 목소리, 내 노래였다.
순간 다리가 풀렸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현기증이 났다. 도저히 믿어지질 않았다. 소리의 출처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바로 옆 길거리 리어카에서 나오는 노래였다. 어떻게 저기까지 흘러갔을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DJ박스로 달려갔다.
음악실로 들어가자마자 "종환씨, 떴어. 난리가 났다니까"라며 팔을 잡아 흔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DJ형은 당장 `존재의 이유'를 틀었다.
정말 굉장했다. 노래가 나가고 셋을 세기 전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누구의 어떤 노래냐"는 문의전화였다. 곡이 끝나고 나서까지 전화는 계속됐다. DJ생활 10년만에 이런 반응은 처음이라는 말과 함께 빨리 방송국으로 판을 돌리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판을 돌렸던 17군데가 다 똑같은 반응이었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