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청춘일기] 한석규(4)
기사입력 1998년 02월 10일 15시 43분
탤런트가 되어 처음에 맡게 되는 배역들은 대개 단역이다. 다방의 손님이나 술집의 웨이터, 아니면 행인 1,2,3 등이다.
내가 처음 맡은 배역이 가마꾼이라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캐스팅이었다.
더군다나 여주인공의 가마꾼이니까 출연도 한번으로 끝나질 않았다. 주인공인 오연수 선배가 가마를 타게 되면 덩달아 출연, 아마 서너차례는 카메라에 잡혔던 것으로 기억된다.
재미있었던 사실은 어떤 선배가 "`아리랑'의 나운규 선생님도 처음 맡은 배역이 가마꾼이었단다. 너도 또 아니? 나운규선생님처럼 큰 스타가 될지"하며 농섞인 격려를 해주었던 점이다.
하루종일 가마를 들고 다니며 땀을 흘리다 들은 그 선배의 격려는 상당한 힘이 되었다. 용기도 생겼다.
당시 베스트극장 `달'의 촬영을 모두 끝낸 뒤, 나중에 책을 뒤져보니까 정말로 나운규 선생이 처음에 가마꾼역을 했다는 걸 알았다.
비록 얼굴이 제대로 카메라에 잡히지도 않았고, 대사 한마디도 없는 배역이었으나 웬지 기분이 좋았다. 마치 나운규 선생이 지켜봐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미치자 슬며시 웃음도 나왔다.
그후에도 계속해서 단역 출연제의가 잇따랐다. 물론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웨이터 역할이 주어지면 일부러 술집에 가봤고, 지하철 승객 역할을 맡게 되면 지하철 안의 분위기를 익히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다니기도 했다.
주간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의 출연 때도 그랬다. 물론 단역이었다.
`우리들의 천국'은 당시 동국대 선배인 학표형(홍학표)이 최진실 선배와 낙양의 지가를 올리며 인기드라마로 자리를 잡고 있던 프로그램이었다.
내게 주어진 역할은 학표형의 친구였다. 공부에만 관심있는, 약간은 꺼벙한 모습을 한 대학생.
처음으로 배역의 이름도 있었다. 현철.
단역이긴 했지만 고정배역이었다. 한번 출연하고 끝나는 단역과 비록 하루에 한번 나오지만 방영될 때마다 얼굴을 내미는 단역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집과 방송국을 오가는 동안 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그때까지 아무도 없었는데, `우리들의 천국'의 출연횟수가 10번이 넘어설 무렵엔 더러 아는 체를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태어난 후 한번도 이사하지 않은(실제로는 6대째 살고 있는) 종암동 집에서 방송국을 다니는 교통수단은 좌석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는 것이었는데, 가끔씩 "어, 저 사람 `우리들의 천국'에 나오는 탤런트 아냐?"하는 소릴 듣기도 했다.
`우리들의 천국'의 주요 등장인물이 전원교체되던 1백회 때까지 계속 출연했으니 지금 생각해봐도 억세게 운이 좋았다.
게다가 `우리들의 천국'을 좋게 봐주신 분들에 의해 곧바로 `아들과 딸'에도 출연할 수 있게 됐다. `아들과 딸'도 고정이긴 했지만 단역이었다.
석호. 주인공은 후남(김희애)과 귀남(최수종)이라는 쌍둥이 남매였고, 석호는 귀남의 같은 과 친구였다.
그런데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갑자기 석호의 배역이 커져버렸다. 문성근 선배가 김희애씨의 남편역으로 출연할 예정이었으나 영화출연 관계로 출연이 무산되면서 석호가 후남의 남편이 되는 것으로 대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졸지에 석호는 주요 배역이 됐다. 귀남이의 학교 친구에서 후남이의 남편으로 격상됐으니까.[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