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청춘일기] 한석규 (3)
기사입력 1998년 02월 09일 15시 23분
무대에 서고 싶었다. 카메라앞에도 서고 싶었다. 목소리로만 연기하지 않고 온몸을 내던져 연기하고 싶었다.
성우도 탤런트 못지 않게 중요한 직업인 걸 알고 있었지만 당시 내 머리와 가슴은 온통 무대에 올라 열연하는 꿈과 온몸을 던져 연기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오죽하면 영화와 연극, 방송을 오가며 전천후로 연기하는 선배들을 쫓아다니며 자문을 구하기까지 했을까.
선배들의 말씀은 "기다리면 기회가 온다. 조급해 하지 말라"는 것이었지만 좀체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MBC TV 탤런트 공채시험 공고가 이 때쯤 났다. 예년과는 달리 여름이었다. 91년 8월.
앞뒤 가리지 않고 응시 원서를 냈다. 탤런트 시험 응시자격 중에는 연령 제한 항목이 있는데, 당시 내 나이가 바로 이 연령 제한의 커트라인에 걸려 있었다. 말하자면 탤런트 공채 시험을 치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 셈이다.
어렵게 찾아온 행운의 여신은 계속 내 뒤를 따라와 주었다. 탤런트 공채 시험에도 합격, `KBS 방송국 성우 22기 한석규'에서 `MBC TV 탤런트 20기 한석규'로 `옷'을 바꿔 입게 됐다.
실업자 생활 1년여만에 성우가 됐고, 성우로 1년 6개월여를 보낸 후 다시 탤런트라는 소릴 듣게 됐다. 그 감회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탤런트가 되기 위한 교육도 만만치 않았다. 대본 읽기 연습에서부터 캐릭터 분석, 심지어는 걸음걸이와 표정 연기까지도 반복을 거듭하며 훈련했다.
그러나 탤런트만 되면 평소에 소망해 오던 꿈을 이룰 것이라는 기대는 곧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좀체로 출연 기회가 주어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뿐 만 아니라 MBC 탤런트 20기생 모두가 상황은 비슷했다. 언제 한번 그럴 듯한 배역이 주어지려나. 기회만 주어지면 멋들어지게 연기해보일 수 있으련만.
모두들 똑같은 희망을 안고 기회가 오길 기다렸지만 그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어쩌다 동기 중의 한명이 단역이라도 맡아 출연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이 때처럼 평범한 외모에 불만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한진희 선배나 노주현 선배처럼 잘 생기거나 현석 선배나 임현식 선배처럼 개성이 강했으면 하고 부러워했다.
차라리 성우를 열심히 계속할 걸 하는 후회마저 들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날 내게 드디어 출연 명령이 떨어졌다. 호출 명령을 내린 분은 당시엔 감히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던 김승수PD였다.
출연 작품은 MBC베스트극장 `달'이었다. 물론 김 PD께서 직접 나를 캐스팅한 것은 아니었다. 조연출을 맡고 있던 분들이 단역 배우들을 일괄적으로 캐스팅하는 과정에서 20기생 몇명을 출연시키기로 한 것이었다.
내게 주어진 역할은 가마꾼이었다. `달'은 최민수 오연수 선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극이었는데, 오연수 선배가 타고 가는 가마를 드는 가마꾼 4명 중의 한 명이었다.
평소 TV드라마에서 가마 행렬을 보았지만 직접 이 가마를 들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리고 그 가마가 그렇게 무거운 줄도 그때 처음 알았다.
극중 오연수 선배가 화급을 다투는 일로 가마를 들고 뛰게 되는 장면이 있었는데, 용인 민속촌의 야산에서 가마를 들고 뛰는 일은 이만저만 힘들지 않았다. 숨이 턱에 차고, 온몸에는 땀이 비오 듯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