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청춘일기] 한석규(2)
기사입력 1998년 02월 08일 15시 27분
아무데도 갈 곳이 없으면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거의 1년여 동안이었다.
길고 어두운 터널은 89년 12월이 되어서야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다음 해 취업시즌을 기다리면서 애꿎은 시간만 죽이던 중 반가운 뉴스를 접했다. KBS방송국의 성우공채시험과 MBC방송국의 탤런트 공채시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목소리로 연기하는 성우나 탤런트 둘다 내 전공과 무관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공교롭게도 시험일자가 같았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서 시험을 봐야 했다.
고민해야 할 일이었지만 쉽게 결정했다. 나같은 평범한 외모로는 탤런트가 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우시험을 보기로 했다. 되기만 한다면 어떤 역할이든지 열심히 하겠다고 각오를 다지면서.
경쟁률은 엄청났다. 탤런트 공채시험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시험을 치르고나서 발표를 기다릴 때까지의 시간은 그야말로 `일각이 여삼추'였다.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었을까. 1년여의 실업자 생활은 KBS성우 22기 공채시험에 합격함으로써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성우가 되어 목소리 연기를 할 수 있게 됐다는 것보다도 일자리를 얻었다는 감격이 더 컸다. IMF한파로 명예퇴직이 빈번해진 요즘의 사회분위기에 남다른 감회를 느끼는 것도 이때의 추억때문이다.
전속기간은 4년. 방송국에 출근해서는 학교 다닐 때처럼 강의를 듣고, 교육을 받았다.
대학때 무대에 서기 위해 발성훈련을 많이 했다고 생각했으나 직업인으로서 성우가 되기 위한 훈련은 그 강도가 달랐다.
혹독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말과 소리, 발음과 발성 등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이때의 훈련이 내게는 보약과도 같았다. "또박또박 대사를 친다"는 평을 듣게 된 것도 당시의 훈련 덕이다.
기본 교육이 끝나자마자 라디오드라마에 투입됐다. 아직 신참이라 TV외화의 더빙이나 큰 배역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저 두어개의 고정배역을 받았을 뿐이었으나 이 정도면 동기들 중에서도 상당히 운이 좋은 경우에 속했다. 기본급에 수당을 더한 게 월급이니까 고정배역이 있는 나는 당연히 동기들보다 월급이 좀더 많았다.
1년여의 암담한 실업자 생활을 보상해주느라 한꺼번에 행운이 몰려오는구나 생각했다.
성우라는 직업을 택한 것에 만족하면서, 또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여기면서 살맛나는 세월을 보냈다. 누구하나 부럽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가슴 한구석으로 허전함이 밀려왔다. 처음엔 그 원인을 알지 못했다.
어느덧 배부르고 등 따뜻해졌다고,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했다. 교만과 허세를 부리면 안되는데 하며 스스로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연극과 영화, TV드라마에 출연하는 선배성우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이 그 원인이라는 걸 아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도 저 선배들처럼 성우도 하고, 탤런트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대학 다닐 때 연기잘한다고 칭찬듣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러나 가슴 밑바닥에서 솟구치는 욕심만 있을 뿐, 아무런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누가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답답함만 더해갔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