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청춘일기] (1)한석규
기사입력 1998년 02월 06일 15시 40분
출연하는 영화마다 빅히트, 매 작품의 개런티를 갱신해 온 배우.
영화를 기획하는 감독들은 저마다 그에게 시나리오를 들이밀고, 영화제작비를 투자하기 위해 작품을 고르는 창업투자회사나 대기업 영상사업부에서는 아예 그에게 어떤 영화에 출연할 거냐고 문의할 정도다.
영화관계자들도 저마다 고개를 젓는다. 도대체 그의 어디에서 이런 괴력이 나오는 것일까.
그러나 그도 3년전, MBC TV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시골출신의 제비족 홍식으로 나와 장안의 여성팬들을 사로잡기 전까지는 와신상담의 세월이 있었다.X편집자 주〉
동국대 연극영화과 83학번인 나는 `지극히 평범하게 생긴 외모'때문에 TV탤런트나 배우따위는 아예 꿈도 꾸질 않았다. 대학 다니면서는 그저 연극만 열심히 했다. 나중에 대학을 졸업하면 `연기잘한다'는 소릴 듣는 연극배우가 되는 게 유일한 목표였기 때문이다.
동국대 연극영화과는 스타의 산실과도 같은 곳. 기라성같은 스타들을 숱하게 배출한 학교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꿈은 이 정도였다.
차범석 원작의 `장미의 성'에 첫 출연하고난 뒤 선배들로부터 "연기 좀 하는데"라는 칭찬을 듣고나서 "아, 나도 배우가 될 수 있겠구나"며 처음으로 자신감을 가졌다.
졸업작품이었던 아서 밀러의 `나의 아들들'(All My Sons) 공연때는 1년 선배인 최민식과 함께 무대에 서면서 졸업 후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89년 대학을 졸업하고난 뒤 부딪친 사회는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쉽지 않았다. 한계를 절감해야 했다.
대학시절의 목표였던 국립극단의 오디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참담했다.
하지만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못한 채 대학로의 군소 극단의 문을 두드리고 다녔다. 어떤 극단에서는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며 보름간 있어보기도 했고, 또 다른 극단에서는 극단사무실을 청소하면서 한달여를 견뎌보기도 했다.
아무런 비전도 보이지 않았다. 배우의 길이 그렇게 멀고 험한 줄은 몰랐다.
생각다못해 취업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광고대행사. PD나 AE같은 직종은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몇군데 시험을 보았으나 모두 낙방. 실기시험은 치러보지도 못했다. 우선 필기시험에서 모두 떨어졌다. 대학시절엔 배우의 꿈을 키우며 연기훈련이나 했지, 영어단어를 외우거나 논문쓰는 공부라고는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학로 극단을 뛰쳐나온 결과는 고작 실업자였다. 대학을 졸업한 실업자. 룸펜.
그래도 매일 아침이면 일단 집에서 나왔다. 어머니 등 식구들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갈 곳은 마땅치 않았다.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을 찾아가 시간을 때우려해도 오후나 돼야 가능했다.
대학시절 무심코 지나치던 장충단 공원이나 남산이 그렇게 고마운 안식처일 수가 없었다. 산에 올라 내려다본 도심에는 고층빌딩들이 즐비했으나 나를 받아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거의 1년여를 무위도식하며 지내던 시절, 정말로 힘든 시절이 이때였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