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정벌(27)
기사입력 1998년 02월 02일 15시 08분
만척은 하귀의 대군이 밀려온 순간 전세가 판가름이 났다는 것을 알았다.
하귀는 선봉과 바짝 붙어 있는데다 이쪽의 측면을 치고 왔으므로 겨우 오순의 선봉을 뚫고나온 이쪽 기마군은 대안으로 우회할 겨를도 없는 것이다.
최경부가 핏발선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장군！ 허목이 죽었소！"
"밀고 나가라！"
만척이 목이 터질 듯이 외치며 말에 박차를 넣었다. 놀란 말이 껑충 뛰어 오르면서 남송 기마군의 말에 머리를 부딪쳤다.
만척은 칼을 날려 송군의 어깨를 베었다. 등을 보이고 물러난다면 전멸이다.
이쪽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질테고 송군은 목만 주을 것이었다. 최경부가 악을 쓰며 칼을 휘둘러 앞길을 뚫었으나 이미 난전이다.
이쪽의 전진은 거의 멈춰졌고 사방은 군마의 울음소리와 쇳소리, 함성과 신음으로 가득찼다.
만척의 위사들이 기를 쓰며 옆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진군 할때는 벌려있던 그들이 위급한 상황이 되자 주위를 둘러싸는 것이다.
"고려군이여！ 우리 모두 여기서 죽자！"
온갖 소음을 뚫고 최경부의 절규가 그의 귀에 닿았다.
"몽골놈에게 한인놈에게 우리 고려군의 기상을 보여라！"
울컥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낀 만척이 칼을 휘둘러 날아온 창날을 쳐냈다.
이미 허복이 이끈 선봉군은 궤멸되었고 하귀의 중군 영기가 이백여보 앞에서 펄렁이고 있었다.
"장군！ 이쪽으로！"
여진족 위사장이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쓴채 옆쪽에서 소리쳤다. 그는 오른쪽의 공간을 본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강의 대안 쪽이다. 머리를 저은 만척은 말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대장이 대안으로 피한다면 장졸들이 모두 따를것이고 강에 막혀 옆구리를 보인채 몰사할 것이다.
"장군！"
투구가 벗겨진 맨머리로 어깨에 창날이 꽂힌채 전령장교가 옆쪽에서 다가왔다. 그는 고려군이다.
"장군！ 고려 장군 이사익이 죽었소이다."
"모르오！"
그리고는 말에서 떨어졌으므로 더이상의 보고는 없다. 지친 말이 앞쪽의 말과 몸을 부딪치더니 뒷걸음질을 쳤다.
이제 밀리는 것이다. 한번 밀리기 시작하면 순식간이다. 만척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고려군을 이렇게 개죽음 시킬 수가 없다.
그 순간이었다. 지친 그의 귀에 대지를 울리는 진동음이 들려왔다.
이쪽은 이미 난전 중이어서 달리는 말들은 없을 터였다. 장세걸의 본진이다. 만척은 이가 부서질듯이 갈아 붙였다.
하귀의 선봉 3만기에 이미 이쪽의 5천기는 궤멸되어 가는 중이다.
거기에다 장세걸의 5만 기마군이 덮쳐 왔으니 이제 뒤쪽의 고려 보군 2만은 말할 것도 없고 카라차르의 중군까지 단숨에 짓밟힐 것이었다.
"에에익！"
만척은 미친 듯이 칼을 휘둘러 앞으로 다가온 말머리를 쳤다. 그러나 그의 말은 다시 뒷걸음질로 물러 났다.
"나가라！"
다시 만척이 악을 썼으나 목이 메었다. 기마군의 말굽소리는 더욱 크게 울렸고 함성이 일어나는 중이다.
그 순간이었다. 온갖 소음을 뚫고 뚜렷하게 고려말이 들려왔다.
"만척이 살았느냐！ 나, 구광이 왔노라！"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