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여옥의야구세상] 조 디마지오의 사랑과 헌신
기사입력 1998년 01월 22일 15시 26분
가장 좋아하는 배우를 꼽으라면 영화광인 나는 꽤 많이 꼽을 수 있다.
다 나름대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의 여배우라면 조안 크로포드, 앤 밴 크로포드, 에바 가드너, 캐서린 햅번을 꼽을 수 있겠다.
친구들은 내가 좋아하는 여배우들이 `의지의 한국인' 형이라며 놀린 적이 있다.
남자의 성적 노리개 역할이나 하는 귀엽고 가냘픈 형보다는 강렬한 이미지의 성격파, 웬만한 남자는 기 죽을 정도의 당당한 체구의 여배우를 골라서 좋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내가 아주 예외적으로 좋아하는 여배우가 있다.
마릴린 먼로이다.
마릴린 먼로하면 자본주의가 극성을 부린 미국의 추악함과 풍요로움이 만든 `허구의 육체파 여배우'라고 문명 비평가들은 이야기한다.
허리와 엉덩이를 따로 놀리면서 걷는 `먼로 워크'는 미국의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을 뜻하고, 입술을 헤벌리고 웃는 백치 웃음은 `뇌가 없는 미국'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아직도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먼로의 죽음은 마피아와 절대 권력 사이에 결국은 희생당하는 미국의 단순 노동자의 삶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물론 마릴린 먼로는 커다란 가슴으로 승부했던, 남자들에게 성욕을 자극함으로써 유명해진 여배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마릴린 먼로를 좋아하는 것은 내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이다.
나는 책이 가득 있었던 창고같은 다락방을 너무나 좋아해서 하루 종일 그 곳에서 보내기도 했다.
거기에는 아버지가 즐겨 보셨던 라이프나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그 가운데 나를 끌어당겼던 것이 다름아닌 마릴린 먼로의 죽음을 맞아 특집을 낸 라이프지의 지난 호였다.
나는 그 당시 이렇게 천사같이 선한 얼굴이 있는가 하고 놀랐다.
그리고 그 여자가 마릴린 먼로였고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사진 가운데 관심을 끈 것은 한 남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안고 울고 있는 사진이었다.
어머니는 바로 그 남자가 먼로의 전 남편이었던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라고 했다.
어린 시절 내게는 먼로와 디마지오의 사랑이 상당히 깊고 서로의 고통을 통해 엮어진 관계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내내 마릴린 먼로는 아주 특별한 여배우로서 내게 자리잡고 있었다.
바로 며칠전 나는 우연히 심야 TV에서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나는 조 디마지오가 그렇게 많은 일을 겪은 야구선수인가를, 그리고 그처럼 빛나는 대기록과 타고난 자질을 가진 선수인가를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정말 알게 된 것은 살아있는 디마지오와 먼로를 통해서 그들의 사랑이 진지했으며 쇼 비즈니스계에서는 드물게 순수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먼로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을 때 장례식을 치르고 모든 것을 마무리한 것도 디마지오였고, 그녀가 죽은 뒤 매달 무덤에 장미꽃을 바친 것도 다름아닌 디마지오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먼로가 관계했던 남자들은 정치가 배우 극작가 사업가 등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먼로를 아직도 가슴속에 묻어 두고 있는 사람은 훌륭한 야구선수인 디마지오였다.
스포츠맨만이 지닐 수 있는 순수함과 열정이 디마지오를 `사랑과 헌신'으로 이끈 것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