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IMF한파이후 등산복 실직자들에게 인기
기사입력 1998년 01월 19일 15시 22분
19일 오전 9시.
서울 관악산 입구에 넥타이를 맨 직장인 차림의 40대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곧 등산로 입구의 한 상점으로 들어갔다.
이어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내쉬며 서서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IMF 한파 이후 서울 관악산, 도봉산 등에 40∼50대 중년 남성들이 몰리고 있다.
정리해고와 `명퇴'로 직장을 잃은 실직자들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 산을 찾고 있는 것.
자신의 실직 사실을 아내에게 알리는게 엄두가 안나 평상시처럼 양복을 입고 출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와 산에서 시간을 보내다 귀가하는 다람쥐 쳇바퀴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관악산 검표소의 박상민씨（52）는 "지난해 말부터 평일에 산을 찾는 40∼50대 남성이 부쩍 늘어났다"며 "차 안에서 양복을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산에 오르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최근 산을 찾는 실직자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을 상대로 등산복을 빌려주는 대여점까지 등장, 성업중이다.
관악산 입구의 `관악산 등산화'는 등산객을 상대로 등산복과 등산화를 대여해주고 있다.
대여료는 하루에 2천∼3천원선.
많을 때는 하루에 10명 정도 이용하기도 한다.
개중에는 가장 싼 등산복이나 등산화를 구입해 이 곳에 맡겨 놓고 다니기도 한다는 게 주인 강현순씨（53）의 말이다.
강씨는 "처음에는 이상한 사람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술을 한 잔 하는 기회가 생겨서 직장을 잃은 실직자라는 사실을 알았다"며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다 할 일이 없으면 산을 찾는다더라"고 말했다.
개중에는 소주 한 병을 들고 긴 한숨을 쉬며 산을 찾기도 한다는 것. 날씨가 나쁠 때는 이 곳에서 바둑을 두거나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때우기도 한다고.
이곳에 실직자들이 몰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을 구한다는 구인광고나 명함을 두고 가는 중소업체 사장들이 부쩍 늘어났다고 했다.
최근 이집에선 기쁜 일이 하나 생겼다.
대기업에서 상무로 있다 명퇴를 한 김모씨（49）가 15일째 이 곳의 단골로 드나들었으나 얼마전 강씨에게 "직장을 구했다"며 술을 한 잔 사겠다고 한 것이다.
강씨는 "장사가 안돼도 좋으니 일거리 없이 산을 찾는 사람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안타까워 했다.
[강병원 기자]
◇관악산 입구의 한 등산복 대여업소. 최근 산을 찾는 실직자들이 늘면서 등산로 입구에 등산복 대여업소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