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정벌(9)
기사입력 1998년 01월 12일 13시 50분
전투가 끝난 것은 그로부터 두식경쯤이 지난 축시무렵이었다.
왼쪽의 만에서 진을 치고 있던 진장 박태이가 도주하는 왜적들을 막아주는 바람에 고려군은 왜적 백여인을 몰살시켰던 것이다.
진장 박태이는 왜적 넷을 베는 공을 세웠으므로 다리가 칼에 찔렸지만 기세가 등등했다.
하지만 고려군의 손실도 커서 죽은자는 부장 둘에 교위 한명 대정 셋에 군사가 이십일인이요, 부상자가 삼십여인이나 되었다.
그러나 근래에 드문 대접전이며, 대공(大功)이다. 게다가 왜선 세척을 놓쳤으나 3층 누각 대선 두척을 고스란히 나포하였으니 강화섬의 왕이 상을 내릴만 했다.
군사를 이끌고 모래사장으로 나온 박태이가 문득 부장 이환을 바라보았다.
"이보오. 부사나리는 어디 계시오?"
"내가 아오? 아마 십리쯤 안쪽으로 도망가 있을게요."
주위에 군사들이 있었으나 부장은 개의하지 않았다.
"모래사장에서 아군이 밀리자 부사나리는 개암골로 도망쳤소. 아마 그곳 골짜기에 엎드려 있을게요."
"허어."
내용 보다도 부장의 기세에 질린 박태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졸들이 모두 그의 시선을 피했다.
부장이 손등으로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씻었다.
"날이 밝으면 내 직접 상소문을 써서 병마사대감께 갈것이오. 만일 고덕산패가 아니었다면."
문득 말을 그친 부장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엇이라고 했소?"하고 박태이가 묻자 부장은 머리를 저었다.
"아니오."
그는 만척을 안다. 만척과 부사가 서로 돕고 사는것도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런데 만척이 화적들과 함께 어느새 바닷가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저기 있소이다. 두령."
강쇠가 가리킨 나무밑의 어른거리는 물체들은 사람이었다.
"멀리도 왔구만."
개암골 안쪽의 제법 넓은 평지에 보령부사 안도창이 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다가가자 저쪽에서 갑자기 소동이 일어났다. 서로 부르고 답했다가 누군가가 고함을 쳤지만 씨가 먹히지 않는것 같았다.
그들이 스무발짝 정도의 거리로 다가갔을때 겨우 모여있던 무리들이 산산이 흩어졌다. 도망치는 것이다.
"잡아라！"
칼을 치켜든 만척이 소리쳤는데 왜말이다. 그러자 부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어둠속이어서 아직 부사 안도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만척은 앞장서서 달려들었다.
"와앗！"
부하들이 함성을 질렀는데 두어명은 왜말로 소리쳤다.
평지여서 숨을 곳도 마땅치 않았으므로 도망치는 쪽은 등판을 훤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부사 안도창을 찾은 것은 잠시 후였다. 그는 어느새 갑주를 벗어던진 맨옷 차림에 머리도 맨머리였는데 칼은 쥐고 있었다.
그의 주위를 부하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도망치다 포위된 것이다. 주위는 순식간에 조용해 졌다.
이쪽 목표는 안도창 뿐이다. 나머지 군사들은 이미 멀리 달아나는 중이었다.
부하들을 헤치고 만척이 다가서자 안도창이 놀란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입만 크게 벌리고 웃었다.
"아니, 별장 아니시오? 나는 또 왜적이라구."
만척이 따라 웃었다.
"부사, 나는 곧 이곳을 떠나오."
그가 한걸음 다가섰다.
"떠나기 전에 후환을 없애야 겠소. 오늘밤 보령부사는 왜적의 칼을 맞고 죽소."
X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