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백수공포증' 노이로제
기사입력 1998년 01월 05일 15시 34분
"백수공포증을 아십니까."
직장인들 사이에 `백수공포증'이 만연하고 있다.
IMF（국제통화기금） 한파로 감원사태가 번지면서 자신도 직장을 잃어 `백수'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치를 떠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는 것.
H그룹 이영훈과장（36）은 "누구도 해고의 희생양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인식에 하루하루가 불안하기만 하다"며 "주위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감원소식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은 물론 집에서 잠도 제대로 못이루는 동료들이 숱하게 많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쯤에 이르면서 직장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백수의 신세가 되지 않으려고 일거수일투족에도 신경을 쓰는 등 백수공포증에 따른 극도의 노이로제에 시달리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게 `실수 노이로제'.
업무를 성공적으로 처리해 출세가도를 달리기보다는 혹시 잘못 보이는 등의 실수나 해 해고의 꼬투리나 만들어주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
간부를 만났을 때 인사를 하기는 했는데 혹시 허리는 제대로 굽혔는지, 표정은 어색하지 않았는지, 상사가 불렀을 때도 `예'하고 대답했지만 너무 늦지는 않았는지, 혹시 불경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는지 걱정되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회사에서 무심코 전화를 받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전화를 건 사람이 인사권자일 경우 혹시 실수나 하지 않았는지 또는 상사가 감원과 관련해 애매한 말을 했을 경우 숨은 뜻이 있는 게 아니냐는 등 불안감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동료들과 대화할 때도 회사에 대한 불만을 잘못 토로했다가 소문이라도 날 경우 해고당할 수도 있다는 피해의식에 실언을 하지 않도록 잡담을 극도로 자제하기도 한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해고의 칼날이 와닿을지도 모른다는 `부재 노이로제' 역시 백수의 공포증을 심화시키기는 마찬가지.
연월차휴가를 가더라도 하루씩 쪼개 간다거나 수시로 회사에 전화를 걸어 동태를 살피는 것은 기본이며 출장을 갔을 때도 업무처리보다는 회사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기 일쑤.
일부 기업에서 낮에는 아무 말 없다가 퇴근 뒤 집으로 전화를 걸어 `내일부터는 회사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해고통지를 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귀가를 하고도 편한 마음으로 쉴 수가 없게 됐다.
이와 함께 지각을 하거나 자리를 자주 비우고 흡연실이나 계단 등에서 잠시라도 어슬렁거릴 경우 근무태만자로 매도될지도 모른다는 `낙인 노이로제'도 직장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있다.
그러나 직장인들을 더욱 공포에 떨게 하는 건 막상 자신에게 해고가 닥쳐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속수무책성 노이로제'.
S사 조영길차장（40）은 "어쩔 수 없이 사표를 내게 됐을 때 아내와 자녀들을 어떻게 볼 지 고민"이라며 "더욱이 아무리 머리를 짜내 봐도 별다는 기술은 물론 자금도 없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고 털어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