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파일] 귀신붙은 형사 (하)
기사입력 1997년 06월 23일 14시 46분
정임순씨（가명·55）의 인생은 기구하기 짝이 없었다.
19세때 시집을 갔으나 무모증에 불임까지 겹쳐 1년만에 소박을 맞은뒤 35년간 식당종업원 생활을 하며 지냈다.
노후에라도 편히 살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잠은 식당 뒤 쪽방에서 자고 끼니는 손님들이 먹다 남은 밥과 반찬으로 대충 때웠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일산에 17평 짜리 아파트를 한채 사고도 4천만원 가까이 지니고 있었다.
정씨의 꿋꿋한 삶은 월세를 낼 돈이 없어 도둑질에 나선 한 청년에 의해 마감됐다. 식당 바로 옆의 오락실 종업원으로 근무했던 최모군에 의해서였다.
사건 발생 2주 전에 오락실을 그만뒀던 최군은 동거녀로부터 선전포고를 받았다. 방세 낼 돈이 없으니 막노동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오지 않으면 헤어지자는 것이었다.
최군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궁리하던 차에 순간 오락실이 떠올랐다. 기계가 35대나 되는 오락실을 털면 월세를 내고도 남을 것 같았다.
최군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오락실로 달려갔다. 잠겨진 문을 따고 들어가 입구쪽부터 오락기의 동전함을 하나씩 털어나갔다. 25번째 오락기를 부수고 있을 때였다.
정씨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락실과 식당은 같은 화장실을 쓰고 있다.
정씨는 오락실에서 간헐적으로 쇳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오락실 문을 살며시 열었다.
깜깜하던 오락실에 빛이 새어들자 최군은 재빨리 입구로 눈을 돌렸다.
정씨였다.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수시로 가 밥을 사 먹었던 터라 피차 얼굴을 잘 알고 있던 사이였다.
"아주머니…."
"이 늦은 시간에 여기서 뭐 하니? 너 오락실 그만 뒀잖아. 손에 든 그 장도리는 뭐냐? 오라, 너 도적질 하러 왔구나. 경찰에 신고해야지."
장도리를 든 최군이 쫓아와 한번만 봐 달라며 사정했지만 정씨는 의연하게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그때였다. 의자가 하나 날아왔다. 절박했던 최군이 식당 의자를 냅다 집어던진 것이었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정씨는 반사적으로 쪽방으로 달아났다.
이성을 잃은 최군은 장도리를 들고 정씨의 방에까지 쫓아들어와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튿날 최군은 사건 현장을 몰래 둘러보러 왔다 경찰이 설치해둔 감시카메라에 잡혀 사건 1주일만에 체포됐다.
정씨의 기구한 인생은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굿을 한뒤 이틀 내내 잠만 잤던 윤형사.
자신에게 붙어 한을 풀려했던 정씨의 영혼이 굿을 통해 이승을 떠났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다행이란다.
"주검앞에서 얼마나 경건해야 하는 지를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직업상 이렇다할 감정 없이 기계적으로 사체를 대하게 마련이거든요. 하지만 그 사건 이후로는 사체를 보기 전엔 꼭 묵념을 합니다."
그뒤부터 윤형사에게는 좋은 일만 일어나고 있단다.
현재 일선 경찰서 강력반 형사인 그는 조직폭력배 소탕과 마약사범 검거 등 각종 강력사건 현장에서 맹활약, 경찰청장상을 비롯, 40여차례 표창을 받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