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반역 (10)
기사입력 1997년 06월 20일 14시 45분
절 뒤쪽의 창고에 갇혀있던 구광은 번쩍 머리를 들었다.
뒤쪽 기둥 사이가 희끄무레 해진걸 보면 날이 밝아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가 집중 한것은 안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였다.
창고는 꽤 넓었는데 절에서 쓰는 행사도구를 쌓아 놓은 곳이어서 깃발과 제구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이윽고 부스럭대는 소리가 다시 들리더니 그것이 가까워졌다.
"이봐, 자매집의 기둥서방이 게 있나?"
속삭이듯 묻는 목소리는 만척의 것이었다.
구광이 상체를 세웠을때 만척이 네발로 기어 바짝 다가왔다. 온몸에서 흙냄새가 풍겨났다.
"땅 서른자를 파는데 여섯이 네식경이 걸렸다. 네 덕분으로 두더지 노릇을 다시한다."
그저 침만 삼키며 눈알만 굴리는 구광에게 투덜거린 그는 단도를 빼들더니 묶은 밧줄을 잘랐다.
"네 놈은 덩치만 컸지 쓸모는 하나도 없는 놈이여."
굵은 삼밧줄로 전신을 묶었으므로 시간이 꽤 걸렸다. 만척은 절바깥의 담 밑으로부터 땅을 파고 들어 온 것이다.
밧줄이 끊기자 구광이 서둘러 일어섰다가 만척에게 옷자락을 잡혔다.
"저기, 굴 안에 송장 하나가 있다. 끌고와 여기에다 눕혀라."
"아니 왜?"
"잔소리 말고, 어서."
구덩이 입구에는 아닌게 아니라 송장 하나가 상반신을 내밀고 있었으므로 구광이 끌어다 놓자 만척은 준비해온 기름을 주변에 뿌렸다.
"이자가 네놈이 되는게다."
밖에서 몽골군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니 이쪽을 눈치챈것 같지는 않다.
"나가면서 구덩이 입구를 막아야 한다."
구광을 구덩이로 먼저 보낸 만척이 부싯돌을 쳐 불씨를 일으켰다.
서너번만에 겨우 불씨를 살린 만척이 기름 위에 던진 순간 불길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송장위와 깃발이 금방 화염에 싸였고 만척은 구덩이 속으로 몸을 밀었다.
"그놈은?"
와락 문을 열어젖힌 왕창국이 고함치듯 물었다. 대웅전 뒤쪽으로 붉은 화광이 밝아오는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예. 불길이 세어서 저희가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인장이 목소리를 떨었다.
"저희가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갔지만 놈은 이미 불에타 죽어있었습니다."
겉옷을 걸친 왕창국이 방을 나왔다. 그가 창고에 다가갔을때 불길은 더욱 거칠어져서 창고는 불덩이가 되어 있었다.
"시체도 꺼내지 못했단 말이냐?"
소리쳐 묻는 왕창국의 옆으로 부장 팽덕이 다가와 섰다.
"이미 놈은 불에타 숫덩이가 되어 있었소이다. 장군."
"분명히 방화렸다."
"예. 묶여있던 놈이 한것 같지도 않소이다."
"그렇다면 다른놈이."
"밖에서 창고 안으로 화전을 쏘았을수도 있소이다."
불똥이 튀었으므로 그들은 서너걸음 뒤쪽으로 물러섰다.
주위에 둘러선 수백명의 몽골군은 이제 불을 끄려고 하지 않았다.
둘러서서 구경만 할뿐이다. 팽덕이 왕창국에게로 한걸음 다가섰다.
"또는 놈을 구해내고 불을 질렀을수도 있소이다. 하지만 시체를 확인할수가 없는데다 방법을 모르니 난감합니다.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