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비화X파일] 24세 K씨 에이즈 복수극 - 하
기사입력 1997년 06월 15일 15시 20분
한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집안에 틀어박혀 울기만 했다. 벽에 머리를 박고 찧어대며 수없이 자학도 했다.
부모님에게는 숨길 수 없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략히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천성적으로 나쁜 아이는 아닌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라며 경악을 금치 못하셨다.
얼마지나 냉정을 되찾은 아버지는 용돈을 쥐어주며 살아있는 동안 하고 싶은 것 실컷 하라고 하셨다. 내가 불쌍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얼마간 지내다 배운게 도적질이라고 다시 게이바로 출근했다. 관계를 갖는 남자들이 십중팔구 에이즈에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상대가 묻지 않는 한 굳이 말할 필요도 콘돔을 쓸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93년 5월과 8월에는 헌혈도 두번 했다. 탑골공원앞과 서울역 앞에 있는 헌혈 버스에서 했는데 일부러 한 건 아니었다.
그냥 지나가려고 하는데 헌혈차 아주머니가 억지로 끌고 들어가는 바람에 마지못해 한 것이다. 에이즈 감염 사실을 밝힐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해부터는 돈벌이가 낫다고들 해 이태원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관계를 맺는 사람 가운데는 돈을 주는 사람도 있었고 옷을 사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 지난해 8월 이태원의 한 록카페에서 미군 소속 흑인을 만났다. 호모로 누군가를 사랑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지갑에 그의 사진을 넣고 다닐 정도로 지금도 그를 사랑한다. 이태원의 한 빌라에서 그와 동거를 시작했다. 사랑은 6번 정도 나눴다.
밤에는 그와 함께 지냈지만 낮에는 가끔씩 강남 호모들의 집결지의 하나인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모 목욕탕으로 가 뜻맞는 호모와 만나 관계를 갖기도 했다.
절도를 시작한 지는 얼마되지 않는다. 호모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범법행위 한번 한 적 없을 정도로 나름대로 깨끗하게 살아왔다.
우연히 알게 된 형을 도와 몇번 좀도둑질을 했을 뿐이다. 지하철 같은데서 취해 쓰러져 있는 승객의 가방이나 양복 주머니에서 지갑을 슬쩍 훔치는 수준이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 제가 저지른 죄 값은 달게 받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조사를 마친 K씨는 고개를 푹 떨궜다.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에 따르면 K씨는 최소 3년형을 받게 돼 있다. 특수절도 및 신용카드업법 위반 혐의를 더하면 그 이상 교도소에서 지내야 될 지도 모른다는게 담당 형사의 말이다.
답답하고 죽고 싶은 마음밖에 없다는 K씨. 구치소를 향하는 그는 끝으로 이 한마디를 조사관에게 남겼다.
"보건소에서 한달에 한번씩 전화하거나 면담을 신청해 짧게는 5∼20분 정도 건강 상태에 대해 묻곤 했는데 형식에 그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에이즈 환자라고 별도 관리한다면서 정작 그들이 얼마나 처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 관심을 기울여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점이 섭섭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