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비화X파일] 24세 K씨 에이즈 복수극 - (상)
기사입력 1997년 06월 13일 15시 15분
서울 종로경찰서 강력반 이모형사는 K씨（24） 아버지의 말을 듣다가 깜짝 놀라 하마터면 홀짝이던 커피를 쏟을 뻔했다.
"아들은 호모다. 92년 에이즈（후천성 면역결핍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들이 불쌍해 보여 죽기 전까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라며 5만원, 10만원씩 용돈을 쥐어주기도 했다. 헌혈도 하고 성관계도 맺으며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으로 안다."
당초 절도범 K씨를 잡기 위해 주민등록상 주소지로 찾아갔던 이형사는 자신이 맡은 사건의 피의자가 단순 절도범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한쪽 구석을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에 머리를 둔기로 맞은 듯한 충격을 입었다.
K씨에게는 특수절도 및 신용카드업법 위반 혐의에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 위반 혐의가 추가됐지만 한 사람에게 혐의가 추가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범인 검거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에이즈 피해자'가 늘 것을 생각하니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와 어디로든 달려가야만 할 것 같았다.
K씨가 법망에 걸려든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 3월 취객의 지갑을 훔치는 절도 행각을 시작하면서.
21일 오후 11시30분 지하철 3호선 녹번역에서 취객의 주머니를 뒤져 현금과 카드가 든 지갑을 훔친 뒤 곧바로 서울 종로구 관수동의 한 단란주점에서 술과 가무를 즐기다 덜미를 잡혔다.
술이 깬 지갑 주인이 카드회사에 도난신고할 것을 우려해 카드로 술값을 먼저 계산하고 술을 마신 것.
이를 수상히 여긴 술집주인이 신분을 추궁하자 K씨는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다음날 돈을 갖다 주겠다며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으나 며칠 뒤 경찰이 수사에 나선 것이다.
"뭐야? 당장 확인해！"
반장의 지시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종로경찰서 담당형사들은 국립보건원, 보건복지부, 노원보건소로 부지런히 전화를 돌려댔다.
특이질환자로 관리되고 있다는 통보가 날아왔다.
K씨를 관리하고 있는 노원보건소에서는 한 달에 한 번쯤 `콘돔을 끼고 성생활을 하라'는 식의 주의를 줬다는 말도 전해왔다.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관계를 갖기 전에 피의자를 찾아내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러던 지난달 20일 오후5시 서울 중랑구 면목3동 사가정역 앞 노상.
수사력을 집중해 2개월 남짓 배회처 탐문 수사를 벌이던 담당형사들은 드디어 K씨에게 수갑을 채웠다.
그러나 에이즈에 걸린 피의자를 처음 다루는 이형사조차 감염이 두려워 K씨에게 스스로 수갑을 차도록 했다.
취조가 시작됐다.
처음 체포됐을 때는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안 뒤 접촉한 동성연애자가 11명이며 콘돔을 사용했다고 자백했던 K씨는 인간적으로 접근하는 이형사의 추궁에 뚝뚝 눈물을 떨구며 모든 사실을 다 털어놨다.
"미안해요 형！ 그동안 관계를 맺은 동성연애자만 30명이 넘어요. 상대방이 거절을 할까봐 에이즈 감염 사실은 숨겼어요. 콘돔도 거의 쓰지 않았구요."
`나혼자 억울하게 죽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에이즈 퍼뜨리기를 해온 K씨는 뒤늦게나마 자신이 얼마나 큰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