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반역 (1)

기사입력 1997년 06월 11일 14시 40분


"왜 이제야 그말을 하느냐?"

이도명이 눈을 부릅떴다. 그는 5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뼈가 굵은 몸에 장신이었다.

무관으로 상장군에 봉해진데다 학문에도 조예가 깊은 탓에 연전에는 이부상서까지 겸한 전력이 있다.

그가 앞에 앉은 이재만을 쏘아보았다.

"어허, 가문의 수치로고. 김시중의 여식 아이가 들말 같다고 하더니만 기어이 욕을 보였다."

"아버님, 그 여자는 진주목으로 간것 같습니다. 방호사 윤의충과 진즉 눈이 맞았다는 소문입니다."

"참으로 철없는 여자로다."

상체를 세운 이도명이 시선을 돌렸다. 강화성 북문 근처에 있는 사저 안이다. 교정도감에서 퇴청한 이도명은 막 저녁상을 물린 참이었다.

이재만이 조심스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버님, 소자는 어찌하면 좋습니까?"

"어찌하긴. 모른척 할 수 밖에."

자르듯 말한 이도명이 길게 숨을 뱉었다.

"곧 김시중이 연락을 해올것이다."

어차피 덮어두지 못할 일이야.

"…."

"또한 궁성 쪽에서도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기회를 이용하려고 할테니."

"전하께서는 소자를 극진히 아껴주고 계십니다. 아버님."

그러자 이도명이 쓴 웃음을 지었다.

"모두 내가 장악하고 있는 군사 때문이야. 내가 심은 별장과 낭장 그리고 서북면에 박아둔 장령만해도 수백이야."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김시중도 마찬가지. 나를 사돈으로 묶어 두려는 이유도 그것이다."

"아버님, 그러시다면."

"김시중이 그년을 데려오면 잠자코 받아라. 아예 쪽지 얘길랑 꺼내지도 말고."

그의 표정이 엄격해졌다.

"또한 파혼을 요구해 오더라도 순순히 응할 것이다. 그것으로 김시중은 나에게 빚을 졌다."

입맛을 다신 그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어차피 이 정국은 오래가지 않는다. 한쪽이 제거될 것이고 그 시점에서는 내 가치가 드러나게 된다."

"아버님, 그러시다면 김영을 며느리로 받으시고 나서도."

"참으로 우매한 놈이로다."

이도명이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계집은 얼마든지 널려있지 않느냐? 왕이 득세하면 가차없이 그년을 베거라. 물론 그땐 내가 왕의 측근에 있겠지만."

이제까지 이도명은 중립의 위치에 서 있었다.

출륙파인 왕과 항몽파인 김준 세력간의 조정역할을 자주 맡았는데 그것은 그의 청렴하고 온유한 인품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난세를 살아가기 위한 방편임이 드러났다.

자식인 이재만도 놀란듯 굳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식도 속은 것이다.

"아버님, 다시 내란이 일어난단 말씀입니까?"

"머지 않았다."

이도명이 뱉듯이 말했다.

"왕과 김시중의 둘중 하나가 제거된다. 양쪽은 지금 서로 한계점에 닿아 있다."

"대감마님."

방문 밖에서 조심스럽게 부르는 소리에 그들은 말을 멈췄다.

"게 누구냐?"

이도명이 소리쳐 묻자 집사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좌복사께서 사람을 보내셨소이다."

기대원이다. 이도명이 이재만을 바라보았다.

"왕이 먼저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