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전란 (36)
기사입력 1997년 06월 05일 14시 00분
"고기가 조금 남았수다."
사내는 친절했다. 그릇에 담긴 삶은 돼지고기를 앞에 내려놓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십리만 가면 동경이오. 동경성 내에는 번듯한 객사가 서너군데 됩니다."
"고맙습니다."
김영은 소금에 찍은 고기를 입에 넣었다.
동경성이 이십리 밖이면 진주목까지는 사나흘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동경은 경상도의 도읍이나 마찬가지로 신라 천년의 고도였다. 그곳에서 금가락지를 주고 말을 빌릴수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목이 메었으므로 김영은 시선을 내렸다. 섬을 떠난지 오늘로 열이틀째가 되었다.
이십평생 한번도 강화섬 밖을 나가본적이 없는 김영이다.
마침내 눈물이 흘러 떨어졌으므로 그녀는 황급히 손등으로 눈을 씻었다.
다행히 주막 주인은 이쪽에 등을 돌리고는 그릇을 챙기는 중이었다.
머리에는 두건을 쓴 남장을 하고 숯가루를 얼굴에 발랐으니 영락없는 부랑인이다.
섬을 나온지 이틀만에 백주 대로에서 야적들을 만나 말과 노자를 모두 빼앗겼는데 지나던 별초군이 다가오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겁탈까지 당할뻔 했다.
야적들은 무기도 변변치 못한 대여섯명 뿐이었으므로 별초군 대여섯이 다가오자 모두 줄행랑을 놓았던 것이다.
그들이 뛰다가 떨어뜨린 금자 두닢과 금가락지가 김영의 전재산이 되었다.
다행히 별초군은 김영의 본색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냥 보냈으니 그때부터가 고행의 시작이었다.
양광도 광주목 근처에서 이곳까지 열흘이 걸렸는데 지붕있는 집에서 자본것은 이틀 뿐이다.
등에 멘 전대에서 쌀을 꺼내 셈을 치른 김영이 주막을 나온것은 신시무렵이다.
동경성이 이십리길이라니 유시까지는 빠른 걸음이면 닿을만 했지만 쇄약해진 몸이었다.
그녀는 사방이 트인 황무지 사이를 터벅거리며 걸었다. 민가도 보이지 않았고 낮은 구릉에는 나무도 없다.
3월이어서 땅이 풀리고는 있었지만 아직도 바람은 매웠다. 생각도 없이 무거운 발을 떼던 김영이 인기척을 느낀것은 구릉길이 꺾어질때였다.
길에 덮인 자갈이 밟히는 소리에 머리를 돌린 그녀는 온몸을 굳혔다.
사내 세명이 이십여보 뒤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운데 선 사내는 조금전의 주막 주인이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것봐. 동행하자구."
이젠 반말이다. 김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적도 없는 구릉 사이에 자신은 박혀 있었다. 사내들은 순식간에 다가와 섰다.
"숯가루를 칠했지만 넌 계집이야. 그것도 반반한."
주막주인이 손끝으로 김영의 가슴을 가리켰다.
"이 가슴좀 보아. 동여 매었어도 이렇게 솟아나왔다."
"네 이놈！"
마침내 김영이 악을 쓰듯 소리치자 사내들이 일제히 웃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그대로 튀어나온 것이다.
"네 이놈들."
모두 목을 벨터이다！
다시 악을 쓰자 사내들이 몸을 비틀며 웃었다.
"계집이 색기(色氣)가 넘쳐 흐르는구나."
사내 하나가 손을 뻗쳐 김영의 어깨를 잡았으나 몸을 트는 바람에 헛손질이 되었다.
"이년을 우선 벗기고 볼일이다."
옆쪽 사내가 와락 달려 들었다.
그는 단숨에 김영의 허리를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