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애] 작부의 순정

기사입력 1997년 06월 03일 12시 50분


사람팔자, 차암…. `산소같은 여자'가 졸지에 `작부'가 됐다.
"작부년이, 니같은 깡패를 사랑하는 건 기막히게 분수를 지키는 게 아니니? 나처럼 분수 잘지키는 사람이 어딨니?"
MBC TV 수목드라마 `내가 사는 이유'.
작부 정애숙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박진구(손창민 분)에게 대든다.
4홉들이 소주 1병을 빈속에 들어붓는다.
이따금씩 손님과 삿대질을 해가며 싸운다. 악머구리같이. 그러나 사랑엔 그지없이 약하다. `마포 핵주먹'_진구를 사랑한다. 그 사랑으로 재생(再生)을 꿈꾸며.
"애숙은 열여덟에, 아버지 노름빚에 팔려 작부가 된다. 고등공민학교도 작파하고…. 심지가 곧다. 목까지 찬 한(恨)을 삭이며 산다. 죽을때 자신이 들어갈 관(棺)값만 벌면 미련없이 세상을 뜨겠단다. 허무주의자다."
`내가 사는 이유'. 70년대. 서울 마포가 무대. `죽어 봤자 울어 줄 사람'도 마뜩지 않은 사람들의 얘기. 광녀(狂女), 작부, 건달, 노름꾼들의 삽화가 아련한 노스탤지어를 자아낸다.
"싸구려 술집들이 덕지덕지 잇대 있던 도화동 거리는, 세트로 재현했다. 작부노릇, 그거 간단한 게 아니다. 어차피 `이영애식 작부'가 될 수 밖에…."
마포. `첫사랑 떠나간 종점/마포는 서글퍼라'. 유행가 `마포종점' 속의 마포는 지금은 없다. 그러나 `가난하지만 가슴따뜻한 사람들'은 아직도 있다.
이영애(李英愛．26). 서울 태생. 1m65, 49㎏. 잠전초등학교~정신여중~잠실여고~한양대 독어독문과 졸업. 중앙대대학원 연극영화과 4학기째. 논문통과만 남겨 두고 있다.
여고 1년때 잡지 `여학생'의 표지모델. 그건 `탤런트 인생'의 신호탄이었다.
대학 2학년때 `투유 초클릿' CF에 홍콩 배우 유덕화와 함께 출연, 이게 CF모델의 도화선. 그 1년후 태평양화학의 여자화장품_`마몽드'에서 `산소같은 여자'가 된다. 출연료도 1천만원 넘게 챙기고.
"고교때 수학을 좋아했다. 이과반이었다. 그런데, 화학 물리는 골치아팠다. 문과반으로 선회, 독어독문학과를 택했다. 릴케의 `고독'과 괴테의 `파우스트'에 빠졌다."
대학 재학때. 노래창작 클럽 `에트바스'맴버였다. 클래식과 재즈, 블루스에 빠졌다. 흑인 랭스턴 휴즈의 시 `할렘강 환상곡'이나 흑인영가 `깊은 강'은 언제나 눈물나게 했다.
피아노를 통해 베토벤과 바흐도 만난다.
뿐만 아니다. 식당 종업원, 백화점 점원도 했다. 스포츠신문 명예기자도 거치고, 말수가 적었다. 그런데도 여기저기 설치고 다녔다. 그러니 언제, 공부하나?
"대학 4학년때… 연기자냐, 광고기획자냐로 고민했다. 졸업무렵 SBS TV 드라마 `댁의 남편은 어떠십니까?'에 출연, 연기자가 됐다."
CF `마몽드'의 연줄이었다.
그러나 이내 SBS TV의 생방송 `출발, 서울의 아침' MC를 맡는다. 1년간. `연기'와는 담을 쌓게 된다.
그러다 KBS 2TV 사극 `서궁'에서 `개시'역을 맡아 `독한 연기'로 인정을 받는다. 이후 `의가형제' `동기간' `아스팔트 사나이' 등에 출연.
"3년 남짓 10여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서궁'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초 `가장 도시적인 이미지의 여자_이영애가 웬 사극이냐?'는,거부반응이 왔다. 어쨌든 `개시'역으로 이 편견을 지워냈다."
영화 `인샬라'의 `이향'역으로 영화에도 데뷔.
`이향'은 남한출신의 미술학도. 미수교국 알제리에서 조난당하는데… 뒤에 북한출신 장교와 만나 이념을 초월한 사랑을 한다.
"`인샬라' 촬영 종료후 보름간 배낭여행을 갔다. 청바지와 티셔츠만 달랑 걸치고. 유러일패스로 기차를 주로 탔다.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을 헤집고 다녔다. 중세의 성(城)은 고혹적이었다. 해질녘, 낯선 도시에서의 한잔의 커피라니…."
이영애. 독서광. 법정스님의 `무소유'는 영혼을 맑게 해준다.
이젠 `기다림'에는 이골이 나있다. 10분 촬영을 위해 1시간을 기다려도 끄떡없다. 언제부턴가 책을 보며 `지겨움'을 다독댄다.
"연기자 초년병시절, 참 괴로웠다. 대학에서 막바로 사회로 이입되는 통에… 사회는 안개였다. 인간관계는 교과서에도 없었다."
아직은 남자에 대한 느낌이 없다.
"결혼은… `자아 검증' 후에나 하겠다. 자신도 추스릴 수 없는 마당에…."
이영애. 친구는 별로 없다. 탤런트－고두심 윤여정 나문희 손창민 등은 언제봐도 정겹다.
"오는 8월쯤 연극 `신의 아그네스'에 출연하려 한다. 아그네스역으로… 지금부터 기다려 진다. 기다림은 희망이다.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