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전란 (30)

기사입력 1997년 05월 30일 14시 46분


"대감, 소직에게 대접이 과분하십니다."

"잘난 남자를 만나는것이 이쯤 나이 여자의 소원일터. 오히려 이쪽이 과분할 것이오."

윤의충의 잔에 닿는 술병끝이 떨려서 조그맣게 딸그락거렸다. 그녀가 손을 떨기 때문이다.

윤의충은 한모금에 술을 삼켰다.

"언제 칼을 맞아 어느곳에 버려질지도 모르는 몸입니다. 인연은 곧 번뇌라고 옛 스승이 말씀 하셨지요."

"그 스승을 베시지 않았소?"

웃음띤 얼굴로 안재연이 묻자 윤의충도 따라 웃었다.

"그렇소이다. 그것도 결국 저와의 인연 때문입지요."

안화옥이 잠자코 아비와 윤의충의 잔에 술을 채웠다.

윤기 흐르는 붉은 입술이 아직도 굳게 닫혀져 있다. 그러나 시선은 조금 들어 올렸으므로 윤의충의 목 아래는 볼것이다.

고려시대의 남녀관계는 개방적이었다. 게다가 오랜 전란의 영향을 받아 그것이 더욱 트여졌다.

과부와 홀아비가 지천으로 널린 세상인 것이다. 윤의충이 안화옥을 바라보았다.

"자. 한잔 받으시오."

잔을 건네자 그녀가 두손으로 잔을 받았다.

"소직은 부랑아나 다름없이 자랐소이다. 한곳에 정착할 인성(人性)이 아닙니다."

"들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의외로 맑고 또렷했다. 이제 시선을 올렸으므로 맑은 두눈이 똑바로 윤의충을 향하고 있다.

"인성은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하는법, 전란통에 황폐 해졌지요."

"허어."

안재연이 끼어들었다. 그는 술잔을 들어올려 보였다.

"이애는 매일 책을 읽는데 요즘은 병서를 공부하는 모양이오. 그러다보니 말의 진퇴에도 수단을 부리는것 같소."

그는 흥이 나는듯 윤의충의 잔에 술을 채웠다. 벌써 두 눈가가 붉다.

"난세에는 영웅이 나는법. 난세가 뜻이 큰 사내에게는 기회가 되지. 자, 듭시다."

다시 윤의충과 안화옥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떤 병서를 읽습니까?"

그가 묻자 안화옥이 처음으로 붉은 입술을 벌리며 웃었다. 꽃이 피어나는것 같은 웃음이다.

"금나라 장군이 쓴 병서인데 이름은 없습니다."

금은 여진족이 일으킨 왕조로 몽골에 의해 패망되었다.

윤의충이 머리를 끄덕였다. 목사 안재연이 자신의 딸을 보여준 이유를 이해한 것이다.

이 여자는 겉은 청순했으나 가슴에 뜻을 품은 여인이다.

윤의충이 목사관을 나왔을때는 자시가 되어 있었다. 호위군사에게서 말고삐를 넘겨받은 그가 막 말에 오르려는 때였다.

"방호사 어른."

어둠속에서 서둘러 여종 하나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목사관의 마구간 앞이었다.

다가선 그녀는 윤의충에게 조그만 주머니를 내밀었다.

"아씨께서 드리라고 주셨습니다."

아씨라면 목사의 부인은 연전에 병사했으니 안화옥이다. 윤의충이 주머니를 받아쥐자 여종이 한걸음 다가섰다.

"받으시면 바로 펴보시라고 하셨습니다."

쓴웃음을 지은 윤의충이 주머니를 열어 안에든 종이를 꺼냈다. 희미한 별빛에 비췬 글을 읽은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읽었다고 전해라."

윤의충은 몸을 날려 말에 올랐다. 대기하고 있던 오륙필의 기마군이 고삐를 채어 다가왔고 윤의충이 앞장을 서자 기마군은 뒤를 따랐다.

깊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