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전란 (29)

기사입력 1997년 05월 29일 14시 51분


내실에 앉아 있던 목사 안재연이 들어서는 윤의충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어서오시오. 방호사."

"섬에서 오느라 늦었습니다."

"괜찮소. 상도 이제 막 들여왔소."

그들은 술상을 앞에 두고 마주앉았다.

술시무렵이다. 오늘은 안재연이 윤의충을 부른 것인데 저녁술을 마시자고 했다.

방호사 관저를 거의 비운 채 오덕도에서 지내는 윤의충이라 목사를 뵌지가 꽤 되었다.

술잔을 든 안재연이 입을 열었다.

"군사는 얼마나 모았소?"

"마군(馬軍)이백에 보군(步軍) 천오백입니다. 아직도 부족합니다."

"한달 만에 그만큼 모은 것도 대단한 일이오. 곧 정병 오천을 채울 수 있겠구려."

"말이 부족합니다. 탐라에서 방목하는 말을 끌어와야겠소이다."

머리를 끄덕이던 안재연이 문득 물었다.

"진주는 고려의 남단이오. 양병(養兵)하기는 쉬우나 거병(擧兵)하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오. 시중대감의 뜻은 무엇이오?"

윤의충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이미 뜻은 같이하고 있지만 이것은 대역모의와 같다.

"대감, 소직은 아직 모릅니다."

"몽골군이 치고 내려오면 뒤쪽은 바다요. 국토만 다시 유린되지 않겠소?"

정색한 안재연은 물러서지 않았다.

"군사를 모아 차츰 북진하는 것이 옳소. 배수진은 군사의 마음을 상하게 하오. 악착 같은 마음은 결코 길게 가지 않는 법이오."

윤의충이 머리를 끄덕였다.

"대감의 이치가 맞습니다. 진주목은 보급창의 구실을 할 것입니다."

"내가 후방 보급창을 맡으리다."

한모금에 술을 삼킨 안재연이 만족한 듯 웃었다.

"몽골은 지금 남송과의 전쟁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소. 남송이 무너지고는 있지만 일이년 안에 멸망 하지는 않을거요. 시기는 지금이오."

"시중대감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소이다."

"빼앗긴 국토를 찾고 왕이 입은 몽골옷을 벗겨야 하오."

안재연이 윤의충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부사 신송준의 사인(死因)을 철저히 밝히라는 왕의 밀지가 왔었소."

"…."

"그래서 왜구의 소행이 틀림없다는 답서를 보냈소."

"신송준은 왕과 내통하고 있었소이다."

윤의충이 그의 시선을 받았다.

"그자를 소직이 베었소이다."

머리를 끄덕인 안재연이 설렁줄을 당겼다.

잠시후에 방문이 열리면서 술병을 받쳐든 여자가 들어섰다. 이십세 전후로 보이는 미인이다.

틀어올린 긴머리에 비단 치마저고리를 입었는데 부끄러운 듯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절을 한 여자가 상옆에 앉자 안재연이 웃음 띤 얼굴로 윤의충을 바라보았다.

"방호사, 내 여식이오. 방호사께 잘 보이려고 오늘은 비단옷에 분단장까지 하고 나왔구려."

여자의 얼굴이 금방 새빨개졌다.

"이름이 화옥이오. 나는 자식이 셋 있었으나 둘이 죽고 남은 건 이것 하나뿐이외다."

윤의충은 여자의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림처럼 고운 모습이다. 김영이 환한 햇빛 속의 들꽃이라면 안화옥은 그늘 속에 핀 연꽃이었다.

"방호사께 술을 채워라."

안재연이 말했다. 희고 가는 손이 술병을 쥐는 것을 보면서 윤의충은 상체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