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전란 (27)

기사입력 1997년 05월 27일 15시 04분


"왕은 아뭇소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냥 물러나왔지요."

임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야단났습니다. 왕은 이제 저를 보려고도 하지 않을 겁니다."

김준의 사저 안이다. 대청에 마주앉은 임연은 어제 일을 보고하는 중이었다.

머리를 끄덕인 김준도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전하께서 무안하셨겠군. 하지만 며칠 전에 어사대부 장온이 3대 독자를 낳았어. 그 사람한테도 금자 몇닢이라도 주었다면 어색하지 않았을 텐데."

"왕이 다급한 것 같소이다. 저까지 부르는걸 보면."

김준이 잠자코 앞마당을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럼 소직은 물러가겠소이다."

임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홀가분한 태도였다.

"기대원이 아무리 수작을 부려도 섬 밖으로는 못 나갑니다. 그렇지 않소이까?"

청을 내려간 임연은 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당당하게 대문을 나갔다.

위사장 송합이 김준의 옆으로 소리없이 다가와 섰다.

"대감, 환관 최유의 말을 들으니 추밀원 부사께서는 보석을 가져갔다고 합니다."

"…."

"보석을 보자기에 싸서 가슴에 품고 나갔고 빈 상자만 남겼다는 겁니다."

그러자 갑자기 김준이 소리내어 웃었으므로 송합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과연 임연다운 짓이다."

겨우 웃음을 그친 김준이 말했다. 아직도 웃음띤 얼굴이다.

"왕은 갈피를 잡지 못했을 것이야. 임연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발정난 멧돼지다."

"대감, 위험한 성품입니다."

"내가 힘이 있는 한 나서지는 않는다."

김준이 정색을 했다.

"부사는 내가 주위를 감시하고 있는 줄을 알고 있어. 그래서 보자기에 보석을 싸고 아침 일찍 이렇게 달려온 것이지."

"…."

"허나 등을 보이면 안될 것이다. 가차없이 찌를 테니까."

"대감, 제거하시는 것이."

김준이 머리를 저었다.

"다른 2인자가 또 생기게 된다. 나는 차라리 임연 같은 2인자가 다루기 쉽다."

청 아래에서 김영이 계단을 올라왔다.

가죽조끼에 승마 바지를 입은 남장 차림이다. 청끝에 멈춰선 그녀가 김준을 바라보았다.

"아버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긴장으로 굳어진 얼굴이다.

김준이 머리를 끄덕이자 청위에 오른 그녀는 김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송합이 그림자처럼 사라졌으므로 청에는 두 부녀만 남았다.

"무슨 말이냐?"

"아버님, 저는 윤의충에게 몸을 주었습니다."

선뜻 말을 던진 김영이 도전하듯 김준을 바라보았다.

김준이 입을 열었다.

"알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말이냐?"

"제 혼사를 파혼시켜 주세요."

"…."

"이재만은 이미 후벽장군이 되었으니 절 데려간다고 해도 아버님의 사람은 안됩니다."

"…."

"저를 윤의충한테 보내주세요."

그러자 김준이 쓴웃음을 지었다.

"당돌한 년, 네년이 사내로 태어났다면 좋았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