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전란(26)

기사입력 1997년 05월 26일 13시 47분


머리를 든 왕이 기대원을 바라보았다.

"김준이 두천을 섬밖으로 내친것은 이미 두천과 우리 사이를 알았다는 증거가 되오."

왕의 얼굴에는 수심이 배어 있었다.

"좌복야, 일이 점점 다급하게 되는것 같소."

"전하, 심려 하실것이 없습니다."

기대원이 입끝으로만 웃었다.

"김준이 전하를 어쩌지는 못할 것입니다. 몽골의 대군을 끌어들일만큼 무모한 인물은 아닙니다."

왕의 내실에는 그들 둘 뿐이었다. 기대원은 매일 왕과 밀담을 나눴는데 그것은 김준도 상관하지 못한다.

기대원은 고려의 좌복야로 정이품 벼슬에 있는데다 몽골제국의 안동장군겸 해동통령이다.

어지간한 몽골 사신보다도 높은 직위인 것이다.

"전하."

기대원이 목소리를 낮췄다.

"작은것은 잊으십시오. 전하의 뒤에는 대몽골제국이 있소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기대원이 몽골식으로 읍을 했다.

"추밀원부사 임연은 김준을 아비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양쪽 집안끼리 다툼이 많소이다. 마음을 편히 하십시오."

기대원이 내실을 빠져나간지 반식경쯤 지났을 때였다. 문밖에서 별장 강윤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추밀원부사 임연이 왔사옵니다."

왕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들라 일러라."

왕이 임연과 단둘이 대좌 하는것은 처음이다.

내실로 들어선 대장군겸 추밀원부사 임연의 얼굴도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왕에게는 성난 표정으로 보인다.

"대장군 임연 문안이오."

승냥이 목소리로 커다랗게 말한 임연이 털썩 무릎을 꿇더니 바닥에 이마를 대었다.

그리고는 시치미를 뗀 얼굴로 앉아 왕을 바라보았다.

"전하, 부르셨소이까?"

"그렇소."

왕이 헛기침을 했다.

임연은 김준과 함께 최씨정권의 최의를 베었다.

왕에게는 김준보다도 막무가내의 성격에다 거친 용모의 임연이 더 두려운 상대였다.

기대원이 주장하지 않았으면 임연을 부르지도 않았다. 왕이 입을 열었다.

"대장군, 내가 듣자하니 집안에 경사가 있다던데 부인이 사내 아이를 낳았다고."

그러자 임연이 눈을 치켜떴다.

"그렇소이다. 전하."

그러니 어쩔테냐는 표정이다. 사흘전에 그의 첩중의 하나가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열네번째 자식이다.

그에게는 이제 집에서 기르는 개가 새끼를 낳은것 보다 조금 비중이 큰 일일 뿐이다.

"그래서 내가 준비를 해둔것이 있소."

왕이 옆에 매달린 설렁줄을 당기자 강윤소가 들어와 제법 무거워 보이는 상자를 내려놓고 물러갔다.

"지난번 내가 몽골에 갔을때 쿠빌라이 황제께서 내리신 물건이오."

왕이 손수 뚜껑을 열더니 임연에게 보이도록 돌려 놓았다.

"황제께서 모으신 보석이오. 나는 이것을 대장군에게 선물로 드리겠소."

상자 안은 눈부신 보석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임연으로서는 생전 보지도 못한 보석들이다.

임연이 시선을 들었다.

"전하, 소신은 이런 귀물을 받을 이유가 없소이다."

"…."

"애새끼를 낳았다지만 소신은 아직 얼굴도 보지 않았소이다."

그가 다시 보석함으로 시선을 내렸다.

입가에는 웃음기가 띠어져 있다.

"허나 전하의 뜻은 알겠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