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공화국] 소산의 몰락 (1)
기사입력 1997년 05월 25일 16시 48분
홍인길, 정재철, 권노갑, 김우석 등 대통령 측근인사와 야당의 정치거물을 싸잡아 구속시키는 것으로 `한보 부정대출'은 그 수습의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국민들 의혹을 씻기에는 부족했다.
게다가 `한보사건 몸통'이라는 주장을 한 야당 국회의원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김현철에 대한 비난이 급등하여 정국의 불안은 끝날 줄을 몰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현철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측근들을 통하여 감추어 놓은 비자금은 건재해 있으며 야당이나 언론이 자신의 국정개입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김현철은 장국장을 비롯한 측근들을 장국장 사무실로 모이도록 통보한 다음 자신도 구기동 자택을 떠나 합류를 위한 출발을 했다.
`어떻게든 꼬리가 잡혀서는 안된다.' 아무리 귀신같이 돈을 감추었어도 불안을 떨쳐내지는 못했다.
지난 92대선 때 선거자금으로 쓰고 남은 돈과 각 기업체 소송사건에 개입하여 안기부 김기섭을 비롯한 자신의 인맥으로 외압을 넣고 받은 대가의 돈이 결코 적지 않았다.
`이번 고비만 잘 넘기면 된다. 자금도 충분하고 인맥도 튼튼하다. 다음 총선이나 지자제 선거때 반드시 정계에 진출할 것이다.' 금융실명제 직전 김현철은 자신의 비자금 대부분을 `돈세탁'하여 측근들 품에 깊숙이 파묻었다.
그의 생각대로 이번이 마지막 고비다. 이번 고비만 잘 넘기면 97대선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다시 한번 재기를 꿈꿀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이 그 고비다.
`군사정부 30년의 오물을 치우는데 꼬박 2년이 걸렸다'며 지난 92년 2월 취임 2주년때 일갈하던 대통령 그늘에 숨어, 대통령 차남 김현철은 이렇게 돈을 감추고 권력에 개입했다.
그의 승용차가 장국장 회사에 도착했다. 빛나는 금테안경을 손으로 몇번 매만진 후 당당한 걸음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대통령이고, 뒤에는 수많은 권력기관에 인맥들이 포진되어 있다. `설마 무슨 일이 있으려고?' 측근들이 모여 앉았다가 일제히 일어섰다.
"앉아요. 자. 너무 걱정들 말고."
김현철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돌아보았다.
"위기인 건 사실이지만 이럴 때일수록 당당해야 합니다. 내가 야당 국회의원들을 고소한 이유도 여기 있어요. 우리가 어떤 공격에도 당당하게 대처하면 국민들은 `아 정말 결백할지도 모른다'라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 고비만 넘기면 됩니다."
자신의 돈을 세탁해 주고 보관한 측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 은밀한 음모는 사실 대통령도 그의 모친인 손명순 여사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도 자식의 결백을 신앙처럼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