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전란 (25)
기사입력 1997년 05월 25일 16시 24분
저녁무렵이 되자 동문거리에는 행인이 들끓었다.
관복을 입은 관리와 별초군, 양인과 종, 유랑인들이 서로 어깨를 부딪고 다닐만큼 번잡했다.
북부의 개경과는 전혀 다르게 활력이 느껴졌고 밝은 분위기였다. 거리 중간쯤에 상호도 없이 주막의 깃발만 세운 기와집 앞도 예외가 아니다.
술에 취한 사내의 고성이 밖으로 흘러나왔고 왁자한 웃음소리도 났다.
객지에서 흘러들어온 두 자매가 차린 주막이어서 성안 사람들은 자매집이라고 불리는 곳이나, 구광이 들어섰을때는 주막안에는 빈자리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 진장어른."
심부름꾼 하나가 서둘러 다가오더니 허리를 꺾었다.
"이쪽으로 듭시오."
그가 안내해간 곳은 뒤쪽의 방안이다.
"술상을 봐 옵지요."
심부름꾼은 바쁘게 돌아갔다. 성이 고씨인 현과 선의 두자매는 이제 심부름꾼을 일곱이나 둔 주막의 주인이다.
주막을 차릴때는 구광이 거의 하루에 한번꼴로 들렀는데 지금은 닷새에 한번이 고작이었다.
진장이 되고나서 나올 틈이 생기지 않은 것이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방문이 열렸다.
술상을 받쳐들고 들어선것은 언니인 현이다. 술상을 내려놓은 현이 앞쪽에 앉았다.
명주치마 저고리를 입고 틀어올린 머리가 단정했다. 뽀얀 얼굴에는 웃음기가 띠어 있다.
"왜 요즘 안오셨어요?"
"진의 일이 바빴어."
구광이 손을 뻗쳐 현의 팔을 쥐었다.
"그동안 언놈하고 배 맞췄나 보자."
"놔요. 오기만 하면 그짓부터 하려고 드니."
어깨를 흔들어 팔을 털어내려는 시늉을 하던 그녀가 억센힘에 끌려 구광의 무릎위에 앉았다.
"선이가 봐요"했지만 현은 두팔로 구광의 목을 감았다. 이미 여러차례 관계를 맺은 터라 몸짓이 농염했다.
"왜구가 진주부사를 베어 죽였다지요?"
구광의 손놀림에 현이 가쁜숨을 뱉으면서 물었다.
"주막안은 온통 그 이야기 뿐이에요."
"그런 모양이여."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으므로 현이 퉁겨 나듯이 구광의 무릎위에서 떨어져나갔다.
밖에서 문이 열렸고 심부름꾼이 허리를 굽혔는데 뒤쪽에 서 있는 두 사내가 보였다.
"진장어른 찾으시는 손님이오."
"들어오시라고 해라."
현이 서둘러 방을 나갔고 두사내가 들어서더니 엎드려 절을 했다.
"전라도 나주에서 온 황방이오."
"안생이올시다."
구광이 머리를 끄떡였다. 이들은 연전에 나주목사 휘하의 장교였다가 죄를 짓고 도망친자들이다.
산에 숨어 화적질을 하던 이들을 사람을 시켜 부른 것이다.
"너희들 용력이 뛰어나다고 들었다."
잔에 술을 채운 구광이 한모금에 삼켰다.
"방호사께서는 너희들 죄를 묻지 않으실 것이여. 게다가 예전 직첩도 그대로 내리실 것이다."
"황공하오."
그들이 다시 방바닥에 이마를 대었다.
잔인무도하여 조정에서는 각 영군의 수령에게 이들을 잡는자는 품계를 올리고 금자 열닢씩을 준다는 방을 붙이도록 했던 사내들이다.
구광이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20대 후반의 건장한 체격이었다.
그가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허나 군기를 어기면 너희들은 내손에 죽는다. 산채로 뼈를 발라내어 살을 씹을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