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재] 웃음보따리 하나 달랑들고 청춘예찬
기사입력 1997년 05월 20일 15시 26분
스물한살의 사내는 눈을 떴다. 집은 아니었다. 창을 드르륵 열었다. 오월의 햇살은 순간 눈을 멀게 한다.
이미 늘어진 한낮. 목이 탄다. 얼굴부위가 욱신댔다. 탁자의 물을 주전자째로 벌컥 벌컥 들이켰다.
거울 속엔 얼굴이 심하게 지그러진, 낯선 사내가 있었다.
'아, 어떡하지? 얼굴이 밑천인 놈이. 어떻게 먹고살지?'
간밤이 그제서야 흐릿하게 살아났다.
친구놈과 포장마차에서 소주 서너병을 깠다. 뭔가 고함과 삿대질이 오갔고, 그리곤 캄캄절벽.
사내-육군 상병 이휘재.
"그때 KBS 1TV 미니시리즈 '신고합니다' 촬영중이었다. 서울에 있었는데 얼굴 곳곳에 아스팔트 부스러기가 박혀있었다. 집에는 들어 갈 수도 없고."
그 며칠후 집에 갔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어쩌다 술한잔." "알았다. 이기 처음이자 마지막이데이!"
몇번의 성형수술을 거쳐 밑천을 건졌다. 그러나 3개월간 우울증에 빠졌다.
개그맨 이휘재. MBC TV '일요일 일요일 밤에' '쇼! 토요특급', 그리고 MBC 라디오 'FM 데이트' '2시의 데이트' KBS라디오 '0시의 스튜디오' 등을 맡고 있다.
죽기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뛰었다. 그래선지 '인기 탈환에 성공했다.
26개월간의 군생활. 제대 3개월도 못돼 그 '진공(眞空)'을 깨버렸다.
"3주전, 촬영하다 김민종형에게 잘못 맞아 코뼈에 금이갔다. 그래도 신이 났다."
이휘재. 왜 인기가 있나? 그 대답은 개그맨 이영자가 했다. 이휘재가 입원중 찾아 온 이영자. 느닷없이 한마디 했다.
"넌 왕자병이 없어서 좋아. 가식이 없고 소탈하고. 너만보면 괜히 편한 거 있지."
이휘재. 군복무때 '신고합니다' 외에 '남자 만들기'에도 출연. 주위에서들 '나이롱 군인'이라고 했다. 뿐인가? 군을 희화했다는 욕을 먹었다.
"넌 좋겠다. 촬영이 많아서. 얼마나 신나고 편하겠니?"
"인마 그래도 군대는 군대야!"
철원땅 일병=이휘재. 청승맞게 비뿌리는 밤. 초병은 여린 짐승이 된다. 그립다. 지금은 떠나버린 첫사랑의 여인, 그리고 어머니.
"김건모형이랑 신동엽형이랑, 그리고 동료 개그맨들과 소주마시던 기억, 환장할 지경이었다."
이휘재. 서울 태생. 예일초등학교-은평중-충암고-서울예전 연극과 졸. 고교때 개그맨이 꿈. 서울예전에 합격했지만 아버지는 표정없이 말했다. "2년후 4년제 대학에 편입해야 된데이."
이휘재는 서울예전이 좋았다. 아니 무대에 미쳤다. 아예 무대에서 살았다. 집엔 1주일에 한 두번 들렀다.
캠퍼스 내 '개그서클'은 황홀했다. 안재욱 신동엽 이영자 표인봉 전창걸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지금은 모두 내노라하는 연예인.
한번은 MBC TV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제작팀들이 서울예전에 들이 닥쳤다.
"개그서클 회장이 누구냐?" 주철환, 김영희 PD가 이휘재에게 물었다. "전데요?" "너, 아르바이트 삼아 우리 방송국에 나와라"
"너 뭐하고 싶냐?" "개그맨요"
며칠후 이휘재는 방송국 FD가 된다. 그러나 실상 '노가다'였다. 소품이나 도구를 챙기는. 주급 10만원.
그후 1년. 이휘재는 이용주PD의 눈에 든다. 드디어 코믹 콩트 '오늘은 좋은 날'로 브라운관에 데뷔.
92년 12월. 스물둘. 개그맨=이휘재의 탄생이었다.
'오늘은 좋은 날' 코너. 이휘재는 별의 별 역을 다한다. 할아버지에서부터 꼬마에까지.
"임하룡. 이영자, 이홍렬, 이경실, 이성미같은 선배들을 만난 건 내게 행운이었다."
개그계의 위계질서는 군대 못지않다. 그러면서도 선-후배간의 '끈끈한 정'이 흐른다.
이휘재. 제대후 방송국에 처음 들르던 날. 입국에서 누군가가 쪽지를 건네줬다.
- 수고했다. 왜 한번도 연락을 안했니? 때때로 생각이 많이 나더라. 널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그지없이 기쁘다. 경실 누나가 -
이휘재는 울지말자면서 그만 울고 말았다. 사내는, 조그만 일에도 때로는 감격한다.
"얼마전 압구정동 빌라로 옮겼다. 손바닥만한 마당이 있는데, 어머님과 어버님은 어린애처럼 좋아 하셔다. 상추도 심고 고추도 평소 어머님은 늘상 '마당있는 집'을 원하셨는데."
아버지(LG화재 이사)의 퇴직도 얼마 남지 않았다. 두누나는 아직 미혼.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휘재는 '가장대우'가 돼버렸다.
"개그맨요? 그건, 물기있는, 웃음제조업자, 아닙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