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경] 연기가 걷어올린 치맛자락

기사입력 1997년 05월 15일 14시 18분


서울 청량리역 부근. 속칭 `588'. 창녀촌. 아직도 애잔한 삽화와 처연한 노래가 잠복돼 있다.
이곳에도 밤이 들면 `삶의 나이테'는 부산하게 움직인다. 케케한 골목. 나이 어린 창녀,한물간 창녀.
그리고 일치감치 취해버린, 하루살이 노동자. 독한 소주냄새. 그 젊은 어깨 위에 속절없이 쌓이는 허무. 싸구려 청바지를 휘감기게 하는 유행가 가락.
세상은, `588'은 다시한번 우울하다.
"지난 4월 중순쯤, `588'에 갔다. 1시간쯤 차 안에서 `588'을 봤다. 유리문 안의 아가씨들,밖의 아가씨들…너무 예뻤다. 차림도 세련되고. 그 골목에 잇대 있는 담배가게, 라면집 등… 그곳도 여느 골목과 다르지 않았다. 뭔가 다를 거라는, 짐작은 일순간에 박살났다."
영화배우 정선경(26．본명 金星希). KBS 2TV주말극 `파랑새는 있다'에서 떠돌이 창녀－봉미로 나온다.
"처음 창녀역을 제의받았을 때, 얼떨떨했다. 그러나…난, 배우다. 받을 수밖에. 무슨 역이든 쉬운 건 없다. 창녀역은 더욱… 배시시, 그러나 섹시하게 웃는 법, 담배 꼬나 무는 법, 남자 꼬시는 법 등…."
`파랑새는 있다'. 변두리, 잡초인생들의 얘기. 사기꾼, 차력사, 떠돌이 창녀, 무명가수 등. 절망 속에서도 희망＝파랑새를 찾아 나선다.
`뭐같은 세상,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주제를 깔고 있다.
영화배우 정선경. 서울 태생. 언북초등학교－구정중－숙명여고－한양대 무용과 졸. 1m66, 48㎏.
아버지는 치과의. 살 만했다. 현대무용은 물론 고전,발레까지 만난다.
대학생때 아르바이트로 애들에게 무용을 가르친다. CF단역도 하고. 그러다 어느 선배의 졸업작품－단편영화에 우정출연한다.
그러나 이는, 영화감독 장선우와 만나는 계기가 된다.
"그때까지도 연기자는, 생각도 못했다. 선생님이 꿈이었다. 장선우 감독이 어느날 만나자고 했다. 기꺼이 만났다. 아마, 다른 감독이었다면 선뜻 응하지는 않았을 거다. 장감독은 영화 `우묵배미의 사랑' `화엄경' 등으로 연결, 내겐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었던 때문이다."
장선우 감독의 출연 제의 영화는 `너에게 나를 보낸다'. 그러나 비상식적, 진한 에로티시즘이 싫었다. 특히 노출이 너무 파격적이어서 거절하고 싶었다.
어쨌거나 이 영화는 정선경의 데뷔작이자 출세작.
청룡영화상 대종상 등에서 신인상을 받는다. 행운이 포개져 날아들었다. 94년이었다.
"장선우 감독을 비롯, 문성근 선배 등이 내게 너무 잘해줬다. `너에게…'에선 `바지입은 여자'로 나온다. 안개 같은 직업을 가진 여자였다."
그 이듬해 1월. SBS TV드라마 `장희빈'에 주역으로 전격 캐스팅된다. 당시 이종순 PD는 `장희빈역에 기성이냐,신인이냐'를 놓고 번민하다 과감하게 신인 정선경을 픽업했다고 한다.
정선경. `청순가련형'. 그럼에도 독살맞은 장희빈역을 소름끼치도록 잘해낸다. `연기파 배우 정선경'을 부각시킨다.
이와 함께 영화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개같은 날의 오후' `돈을 갖고 튀어라' 등의 영화에도 출연, `잘나가는 배우'가 된다.
96년에도 영화 `그들만의 세상' `지상만가'에 잇달아 출연한다.
5월24일 명보극장에서 개봉될 영화 `삼인조'에도 출연했다.
`삼인조'는 세상의 아웃사이더 3인의 이상향을 찾는 얘기.
수녀를 꿈꾸는 미혼모, 마리아역－정선경. 삼류 색소폰주자이면서 상습자살중독증에 걸린 사내역－이경영, IQ 80에 무식과격파역－김민종이 나온다. 이들 3인이 얽히고설키는 구성은 음울하다.
영화배우 정선경. 밝다. 성격이 급하다. 솔직하다. 맘에 안들거나 피곤한 사람은 사절.
연예계에선 최진실 심혜진 오연수와 가깝다.
틈만나면 재즈발레를 한다. 느끼는 대로 춤출 수 있고 에어로빅과 비슷, 까다롭지 않아 좋다.
최근 비디오로 본 만화영화 `웰리스 & 그루밋'은 감동적이었다.
"우울할 땐 곧잘 영화를 본다. `미저리' `톨로레스' 등에 출연, 인상적 연기를 보여 준 영화배우 캐시 베이츠는 얼마나 근사한가."
고교때 읽은 도종환의 시집 `접시꽃 당신'은 잊혀지지 않는다.
－`파랑새는 있다'에서 차력사 병달(이상인 분)과는 사랑하는 사이가 되나?
"작가도 모르는데,내가 어떻게 아나? 극중에선 병달과 이런저연 인연이 간단없이 얽혀지고 있긴하지만… 내 인생도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그러나, 일단 `잊혀지지 않는 배우'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