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전란 (11)
기사입력 1997년 05월 10일 15시 31분
다음날 미시무렵, 배는 쌍돛을 부풀리고 모슬포를 떠났다. 하늘은 쾌청했으며 동남풍이 일었다.
해변에는 현령과 진장 호장이 주민들과 함께 나와 순조로운 항해를 기원해 주었다.
갈매기 몇마리가 배를 쫓아 날더니 육지가 아스라이 멀어지자 되돌아갔다. 배중손은 신이 났다.
아래쪽 선창에서 소리쳐 수군들을 꾸짖는가 했더니 곧 왁자한 웃음소리가 났다.
병사들의 사기도 웃음속에 배어났다.
구광이 이층 갑판에 서 있는 윤의충에게로 다가왔다.
"장군, 종년들을 어찌할 생각이시오?"
그는 입냄새를 가리려고 얼른 입을 닫았지만 두눈의 흰창이 붉다. 낮술을 마신 것이다.
"데려오너라."
구광이 내려가더니 곧 두 여인을 데리고 올라왔다.
현청에 속해 있던 종들로 바로 어제 저녁 윤의충에게 호구속이라도 가겠다는 여종과 그 여동생이다.
현령은 아침에 노비문서와 함께 자매를 윤의충에게 보내주었던 것이다. 현인이었다.
그는 윤의충의 약속을 대신 지켜주었다. 여인들은 갑판위에 나란히 앉았다.
둘다 곱상한 용모였는데 언니는 막 피어난 꽃이라면 동생은 벌어지려는 봉오리다.
윤의충이 언니를 내려다 보았다.
"난 진주목으로 간다. 그곳에 내려 줄테니 너희들은 제각기 갈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알고 있사옵니다. 방호사어른."
언니가 다소곳한 얼굴로 대답했다.
"방호사어른을 뵙게 된건 모두 부처님 공덕이오."
윤의충이 가슴속에 넣었던 노비문서를 그녀의 앞에 던졌다.
"현령이 덕이 있는 사람이다. 네 스스로 문서를 찢어라."
"은혜가 크옵니다."
언니가 노비문서를 집더니 두손으로 몇번 찢은 다음 바다에 뿌렸다.
바람에 날린 종이조각 하나가 뒤에 서 있던 구광의 얼굴에 덮였다가 떨어졌다.
"씨종이었느냐?"
"아니오. 제 아비가 대죄를 짓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종이 되었습니다."
"…."
"아비는 서경 단파진의 부장이었는데 진에 쌓여 있던 양곡을 모두 몽골군에게 빼앗겼다고 하옵니다."
진의 부장이면 외관으로 8품 벼슬이다. 아마 아비는 참수형을 당했을 것이고 가족은 전국의 영군(領郡)으로 내치는 것이 상례이다.
"무얼하고 살 것이냐?"
윤의충이 묻자 언니가 머리를 들었다.
생기있는 시선이다.
"저희 자매는 어렸을 적부터 주방일을 했사옵니다. 이제 양인(良人)이 되었으니 주막이나 차릴까 하옵니다."
"재물은 모아 두었느냐?"
"은자가 세잎 있으니 품을 팔아 더 모읍지요."
머리를 끄덕이던 윤의충이 가슴속에서 묵직해 보이는 가죽 주머니를 꺼내어 그녀 앞으로 다시 던졌다.
"사금이다. 그것이면 성내에서도 꽤 큰 주막을 얻을 수가 있을 게야."
그는 턱으로 뒤쪽의 구광을 가리켰다.
"저기 저 교위어른이 너희들이 부탁하지 않아도 어려운 일을 처리해 주실 것이다."
자매가 일제히 머리를 돌려 구광을 올려다 보았으므로 구광의 얼굴이 붉으죽죽 해졌다.
정색을 한 윤의충이 말을 이었다.
"허나 절대로 공술이나 외상술은 주지 말아야 될 것이야. 그랬다간 주막이 곧 거덜이 날터이니 명심하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