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공화국] 아버지와 아들 (8)
기사입력 1997년 05월 10일 15시 31분
제일무역은 아직 정치적으로 컬러가 없다.
보통 대기업은 여당에 정치기탁금을 바쳐 권력의 도움을 받지만 제일은 그럴 여유가 없다.
하지만 차기 정권인 제8공화국에서는 확실한 지분을 받아내야 한다.
소위 줄을 잘 서야 하는데 마땅한 임자가 없다.
여야 적당히 정치자금을 대주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허원행이 고안한 것은 기업이 권력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권력 스스로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다.
노동법 파문이 가라앉으면 곧이어 `한보'가 터질 것이라는 정보는 대단히 유익했다.
사채시장에서 잔뼈가 굵으며 권력의 향방에 촉각을 세워 살아왔다.
그래서 정치판도 흐름에 남다른 후각을 가지고 있는 허원행이다.
`조직정비를 서두르자.' 여기까지 생각한 허원행은 정치잡담을 끝낸후 여자를 불러들였다.
이미 방향은 정해졌다.
그리고 밀고 나가기만 하면 된다. 오늘은 질펀하게 즐기기만 하면 된다.
금융계 황제 이성구는 술을 마시면서도 잠시도 장혜정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여자를 소개한 허소장에게 무엇으로 보답하지?' 다른 사람들은 술집에서 제공한 여자들을 끼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지만 이성구는 장혜정 옆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술잔이 오가고 여자들의 교성이 터지고 불러온 밴드에 맞춰 춤을 추면서도 허원행의 머리는 박태준 전 포철회장 생각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야！"
잔뜩 껴안은채 춤을 추던 여자가 갑자기 비명을 질러댔다. 허원행이 박회장을 생각하느라 그만 발을 밟아버린 것이다.
"허허… 미안해… 이거 춤 솜씨가."
"괜찮아요. 계속해요."
박회장이 직접 대통령에 출마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대선을 앞두고 일본에 그대로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적당한 기회에 귀국할 것이며 정치이념상 한핏줄인 박준규 박철언과 보조를 맞출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구심점 없는 TK세력에 박태준의 출현은 엄청난 변화를 줄 것이다.
"JP와 DJ가 박태준에게 유혹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한동안 JP에게 서운했던 박준규나 당무(黨務)에 소외되었던 두 정치가(박준규, 박철언)는 박태준과 손잡고 TK의 새 세력확장에 혼신의 힘을 다할것이다."
허원행의 머리에서 박태준 회장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누가 잡던 박회장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천군만마 대 응원군이 된다.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일본으로 쫓겨갔다가 94년 10월 어머님 장례식에도 참석지 못했던 박태준.
지금 그는 상한가의 정치인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