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전란 (4)
기사입력 1997년 05월 02일 14시 03분
배중손은 바닷가의 바위 밑에 앉아 있었는데 윤의충을 보자 벌떡 일어섰다.
"장군, 왜선치고는 대선（大船）이오. 삼층 누각에 쌍돛으로 고려 해안을 치는 왜선 같지가 않소이다."
그가 가리키는 앞쪽에 두척의 거선（巨船）이 떠 있는 것이 마치 두 덩이의 바위산 같다.
바람과 비는 그쳤지만 파도는 세었다.
바위를 때린 파도가 그 거선들에 물보라를 뿌렸다.
"왜적은 얼마나 될 것 같으냐?"
"저 놈이 군선（軍船）이라면 척당 백명은 싣습니다."
그렇다면 이백이다.
윤의충이 머리를 끄덕였다.
"뭍으로 끌어내어 칠 것이다."
"치신다면 그 수단밖에 없소이다."
포구 안은 파도가 가라앉아 있기도 했지만 대선이어서 흔들림이 적다. 그 때문인지 뭍으로 나온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몸을 돌린 윤의충이 뒤쪽을 바라보았다.
반대쪽 포구에 닻을 내린 이쪽의 배를 그들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배중손이 바짝 다가섰다.
"장군, 화전을 가져오겠소이다."
화전은 이쪽의 배에 실은 것을 떼면 된다. 배에 불이 붙으면 왜적들은 뭍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다.
머리를 끄덕인 윤의충이 뒤에선 장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보다 머리통 하나만큼 더 큰 구광이 뒷전에 서 있었는데 소집에 조금 늦었다.
"넌 그동안 나하고 정탐하러 간다."
배중손이 이십여명의 군사들을 끌고 날듯이 달려 사라졌다.
바위밑에 모인 장졸은 이십여명이다. 윤의충은 교위 한명에게 지휘를 맡기고는 바위밑을 나왔다.
구광이 뒤를 따른다. 칠흑같이 어두운 백사장을 앞장서 걷던 윤의충이 문득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이탈했을 때에는 네놈을 내쫓겠다. 그땐 개경으로 돌아가 다시 마름노릇을 하든지 해라."
"잘못했수."
구광이 낮게 말했다.
"색시 생각이 나서 그랬수."
왜선과 오십보쯤의 거리에 이르자 배안의 소리가 들렸다. 왜말이다.
두 척이 나란히 정박하고 있었으므로 앞쪽 배만 보였고 배중손의 말대로 삼층누각의 거선이었다.
배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없는 것은 뭍쪽을 조심하고 있는 것이다.
문득 윤의충이 구광의 어깨를 잡아 눌렀으므로 그들은 모래사장에
나란히 엎드렸다.
파도가 거칠어서 물보라가 휘몰려 왔다.
왜선은 뭍에서 삼십보쯤의 거리에 떠 있었는데 선수를 이쪽으로 향하고 있다.
그순간 구광은 모래사장 위에 몸을 납작 붙였다. 어둠에 익숙해진 그의 눈에 앞쪽에서 흔들리는 물체가 보였던 것이다. 사람이다.
배중손은 왜인은 모두 배에 있다고 했으나 뭍으로도 나와 있었던 것이다.
바짝 다가온 윤의충이 낮게 말했다.
"모두 여섯놈이다."
그가 손끝으로 여러 곳을 짚었으나 구광에게는 한두 곳밖에 확인되지 않았다.
"쪽배를 내리지도 않고 뭍에 올라온 걸 보면 저놈들은 결사조다."
구광은 온몸을 굳혔다.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닌 것을 느낀 것이다.
비상시에는 뭍에 올라온 사내들이 시간을 벌 동안 배는 바다로 들어가려는 것이다.
한동안 앞쪽을 바라보던 윤의충이 구광의 어깨를 짚었다.
"돌아가자. 놈들이 눈치채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