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 '권투에 푹 빠졌어요'

기사입력 1997년 05월 01일 14시 06분


"이친구야,너 이게 데뷔작이자 은퇴작인 줄 알아,그것도 연기라고 하냐?"
정을영 PD는 `저승 사자'였다.
KBS 2TV 미니시리즈 `아스팔트 내고향' 촬영장. 새끼 탤런트 이병헌(李炳憲．26)은 조연. 동기생중 가장 빨리 픽업됐다는 기쁨도 잠깐. 탤런트라는 게 `엿장수 맘대로 되는 게'아니었다.
"툭하면 욕먹고,그것도 중인환시리에…따악,죽고만 싶었다. 당시 스물이었으니,뭐가 뭔지도 몰랐고. 그 한참 뒤 정을영 PD는 지나치다 한마디 툭 던졌다.
`다,늬 잘되라고 그런거야,털어버려'"
안 털어버리면 어쩔건가?
한동안 영화에 빠져있던 이병헌이 브라운관에 다시 떴다. SBS TV 16부작 드라마 `아름다운 그녀'. 고아출신 권투선수 황준호역.
선영(심은하 분)과 아련한 사랑에 빠진다. 선영은 디스플레이어. 쌍둥이 남매를 둔 젊은 미망인. 미국유학파인데다 아버지는 의사다.
가난하고 가방끈 짧은 준호와의 사랑은,애당초 비극이다.
뒤에 둘은 결혼. 준호는 데릴사위격. 권투를 안 한다는 전제하의 결혼. 그러나 준호는 어디서나 아웃사이더. 결국 가정을 뛰쳐 나와 권투를 택한다.
준호역을 위해 이병헌은 강남 양재동 록키체육관에 3개월간 붙박았다. 난생 처음 죽을 고생을 했다. 하루 네댓시간씩 뛰고 굴렀다.
"와아,복서라는 게 엄청난거데. 그 지옥훈련이라니！ 본디 복서 지망생에겐 6개월간 줄넘기만 시킨다. 물론 샌드백은 만지지도 못한다. 그런데,난,특별대우를 받았다. 3개월 만에 `10년 묵은 복서'가 돼야 만했다."
3개월간 몸무게 7㎏이 날아갔다. 이 통에 이병헌을 몰라보는 친구도 생겼다. 어머니는,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 몰골이 뭐냐? 캄보디아 병사같구나！"
결국 병원신세. 와병중에도 외출증을 끊어 촬영에 응해야만 했다.
"한번은 봉천동 고갯길,400m를 질주하는 봉고를 따라 뛰었다. 여기서 세번이나 NG를 냈다. 체면도 구겨지고…네번째 또 대시했는데… 고개마루턱에서,그만 기절했다. 일순 호흡이 멎고 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일어서 다시 뛰었다."
스태프들은 이병헌에게 두손 들었다.
`사람이야? 독사야?'
탤런트 이병헌. 서울 태생. 대왕초등학교－영동중－중동고－한양대 불문과 졸. 중앙대 신방대학원 연극영화과 재학. 1m77,74㎏.
동생 은희(21)는 96년 미스코리아 진.
대학생 이병헌은 날라리. 학교앞 학사주점을 들락대는 다람쥐였다.
일쑤 막걸리에 취한 채 강의를 받기도 했다.
KBS TV 14기 탤런트가 된 건 우연이었다. 한번은 엄마 친구들이 탤런트 응시원서를 디밀었다. "이게 뭡니까? 저,탤런트 안합니다." "얘,엄마 친구들 성의를 봐서라도 한번 응시해봐. 밑져야 본전 아니니? "
사진도 친구가 얼기설기 찍어준 `막 사진'을 냈다. 그런데,선무당 사람잡았다. 덜컥 합격하고 만 것이다. 대학 2학년이었다.
그러니,강의시간을 무슨 수로 챙기나? 교수들의 이해로 그럭저럭 졸업은 했다.
민희식교수는 `프랑스 영화 감상문'으로 시험을 대체케 했다. 지금도 레오카라 감독의 `나쁜피'는 기억에 남는다.
"탤런트 3개월 연수는 살벌했다. `별보기 운동'이었다. 가락동 집에서 새벽 5시에 나서,밤 12시가 돼야 귀가할 수 있었다."
뒤에 알았지만 이병헌은 맨꼴찌로 탤런트에 붙었다. 그만이 `생짜'였다. 동기생들은 하나같이 이미 연극이나 영화에 기웃거려 본 경력자들. 손현주 김호진 배도환 등이 동기생.
"연수중,대사를 읽는데,모두들 킬킬대고 야단이었다. 그러더니 `이병헌,너,소설책 읽냐?'…야,열받데…."
그러나 뭣보다 힘든 건 `인간관계'. 대학생인지 사회인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한번은 담담 PD에게만 별 생각없이 커피를 건넸다. 그러자 주변 스태프들이 한마디 했다. "야,누군 입이고,누군 아가리냐?"
연수3개월후 최종테스트. 1등은 의외로 이병헌. 나상엽 PD는 등을 토닥거려 주며 말했다.
"넌,타고난 탤런트다. 잘해봐！"
`아스팔트 내고향'을 신호탄으로 `내일은 사랑' `폴리스' 등의 드라마에서 잇달아 주연을 맡는다.
SBS TV의 드라마 `사랑의 향기' `아스팔트 사나이'로 부∼웅 뜬다. 이후 1년6개월간 영화에만 매달린다.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 가' `런 어웨이' `지상만가' 등.
이병헌. 스키 수영 등 만능스포츠맨. 사내답다. 직선적이다. 거짓말을 못한다. CF촬영차 시드니에 갔을 땐 짬을 내 골드코스트에 가서 번지점프도 했다.
아나운서 손범수,가수 임창정,탤런트 오현경 최진실과 죽이 맞는다. 영화배우 리처드 기어와 레오나르드 디카프리오를 좋아한다. 영화 `시네마 천국'을 여섯 번이나 봤다.
"`1회용 반창고'가 되고 싶진 않다. 살아남는, 배우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