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전란 (2) ♣
기사입력 1997년 04월 30일 15시 12분
저녁무렵 배가 닻을 내린곳은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에 속한 모슬포라는 조그만 어촌이다.
이미 장대같은 빗줄기와 함께 강풍이 몰아쳤고 집채같은 파도가 일어나고 있었다.
대개 어촌은 말굽형 지형의 안쪽이나 뻗어나온 산줄기를 벽으로 삼고 형성이 되었는데 모슬포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안쪽이었다.
천연의 피항처였다. 모슬포는 민가 백여호쯤 되었지만 수차례의 전란을 겪은 끝에 폐허가 되었다가 근래에 백성이 다시 모였다.
그러나 이십여호에 주민은 백여인 정도였다. 배가 들어섰을때 요란하게 종소리가 난것은 왜구가 들어오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도망갔던 주민들이 되돌아 온것은 두식경도 더 지나서였다.
어촌 안쪽의 호장(戶長) 집은 반 정도가 불에 탔지만 남은 부분만 해도 꽤 컸다.
전란전에는 부유한 선주댁 이었겠으나 지금의 주인은 다른 사람이다.
대청에 앉아있는 윤의충에게 다가온 호장이 마루끝에 엎드렸다. 온몸이 흠뻑 비에 젖어 있었다.
"방호사 어른, 소인이 아둔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항 안에 배가 들어서자 종을 치고는 냅다 도망질 한것을 말하는 것이다.
"달포전에 왜구가 들어와 셋을 죽이고 아녀자 넷을 업어 갔소이다. 그래서."
"죄 지은것 없다."
윤의충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양곡을 걷어 병사들 먹일 생각도 할 것 없다. 우린 바람만 그치면 떠난다."
"황공하오."
납작 엎드렸던 호장이 머리를 들었다. 마른 몸매의 사십대 사내였는데 헤어진 옷사이로 살이 다 보였다.
"방호사 어른, 아녀자는 많소이다. 수청을 들게 하옵지요."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얼른 머리를 숙였다.
"예. 미색이 제법 있소이다."
"필요없다."
몽골군은 남자를 만나면 죽이거나 끌고 갔는데 물론 여자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전란중에는 남자보다 여자의 생존비율이 높은 것이다.
호장이 물러가자 대청 하단에 서 있던 구광이 윤의충을 바라보았다.
밖은 이미 칠흑같은 어둠에 덮여 있었고 비바람이 세찼다.
"장군, 잠시 밖에 나갔다 오겠소이다."
"병사들이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해라."
"염려 마옵시오."
구광이 서두르듯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김준은 그에게 구광을 포함한 교위 둘에 대정 세명, 군사 삼십명을 호위군으로 떼어 주었던 것이다.
모두 별초군에서 차출한 군사들이었다. 대청 옆쪽의 부엌에서 서너명의 군사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배에 실었던 양곡을 내어 늦은 저녁을 짓는 것이다. 밥이 익는 냄새가 났고 고기 굽는 연기가 집안에 깔렸다.
윤의충은 문득 머리를 들었다.
대청 건너편의 반쯤 불타 무너진 창고 귀퉁이에서 반짝이는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쪽에서 흘러간 등빛이 반사된 그것은 마치 짐승의 눈이었다.
한동안 그곳을 쏘아보던 윤의충은 그것이 사람의 눈빛이라는것을 알았다. ….
그리고 아이다.
기둥밑에 조그맣게 웅크리고 앉은 아이는 부엌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의충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창고 옆으로 나타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여자다.
아이에게 다가간 여자는 재빠르게 안아들었다. 비에 젖은 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