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공화국] 머리를 굴려라 (7)
기사입력 1997년 04월 28일 16시 47분
허원행은 침대에 걸터앉아 TV화면에 비쳐지는 신한국당 국회의원들의 날치기법 통과 모습을 넋잃은듯 바라보고 있었다.
당 지도부나 강경파 의원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법을 무사히 통과시킨것을 만족스러워 하겠지만 머리좋은 허원행은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조짐이 안좋은데."
지금은 공화당 시절이나 민정당 시절이 아니다. 날치기 통과가 무사히 넘어가리라 생각하면 그건 큰 오산이다.
지난밤. 술자리에서 먼저 자리를 뜬 의원의 기억이 머리에 떠 올랐다.
그는 먼저 수화기를 들어 제일무역 차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혜정이와 함께 금호동으로 가기는 했지만 밤을 새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호가 울리고 잠시후 가라앉은 차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차성덕입니다."
"접니다. 허원행입니다."
"아, 허소장 …웬일이오. 아침부터."
"지난밤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틀림없이 옆에 부인이 있을것이다. 그러니 혜정이의 이름을 꺼내지는 못한다.
"고맙긴 …내가 할 말을."
"다름 …아니라 당장 회사에 출근하셔서 회장단 회의소집을 하셔야 합니다."
"회장단 회의?"
현재 다섯개의 기업체를 가지고 있다. 이 그룹의 직원만 해도 3천명이 넘는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회장단 회의를 해야 할 만큼 다급한 일도 없다.
"소나기는 피해야합니다. 오늘아침 신한국당 단독으로 노동법을 통과 시켰습니다."
"그럼 됐잖아? 그렇지 않아도 회사가 어려운데."
"아닙니다. 거꾸로 가야합니다. 회장단 소집 하셔서 제일무역은 정리해고제 없으니 안심하라는 지시를 내려야 합니다."
"무슨 소리야. 기업체에서 원하고 있는게 전부 그건데."
"이번 날치기는 실패합니다. 노동계가 목숨걸고 투쟁할 것이며 대대적인 파업을 벌일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손실이 절대 적지 않을겁니다."
이미 정세를 손바닥 보듯 보고있다.
박영길 위원장이 이끄는 `민노총'을 과소평가 해서는 안되며, 제일무역의 노조 대부분이 민노총에 가입되어 있다.
이들의 파업을 사전에 차단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어차피 존재할 노조（勞組）라면 복수노조를 인정하는 것이 유리하다.
"하지만 국회서…."
"회장님. 국회통과는 의미가 없습니다. 문제는 제일무역이 노동쟁의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목소리가 매우 절박했다. 금호동의 혜정이와 가졌던 짜릿한 정사의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은 아침이다.
차회장은 토스트 한조각으로 배를 채운다음 비서진을 시켜 긴급회의를 지시했고 그 자신도 삼성동 본사 사무실로 서둘러 출근했다.
노동법 통과소식을 들었던 임원들의 얼굴이 매우 밝아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