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암투 (31)
기사입력 1997년 04월 28일 14시 33분
"어딜 가신지는 모릅니다."
당돌하게 머리를 든 여종이 김충과 이재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말을 타고 가시면 도무지 행적을 알수가 없사옵니다."
"이런 고약한."
이맛살을 찌푸린 김충에게 이재만이 다가와 섰다.
"됐소이다. 소직은 이만 돌아갈까 하오."
희고 잘생긴 얼굴에는 웃음기가 떠올라 있다.
"아직 혼례도 치르지 않은 터이니 내외 하는것은 당연합니다."
대문밖까지 이재만을 배웅하고 돌아온 김충이 여종을 다시 불렀다. 사저의 마루에 걸터앉은 그의 표정은 조금 전과는 달리 험악해져 있었다.
"네 이년, 그애가 간곳을 대라."
"소녀는 모르옵니다."
여종은 기가 질린 표정이었다. 그러자 김충이 머리를 끄덕였다.
"당장에 섬 밖으로 내칠 것이다. 네년이 모를리가 없다. 자, 어디로 갔느냐?"
"……."
"좋다. 네이년."
김충이 마루에서 벌떡 일어난 순간 여종이 입을 열었다.
"말을 타고 귀석골로 가셨소이다."
"거긴 왜?"
"그냥 가신다고만 했소이다."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귀석골에는 이미 짙게 그늘이 깔려 있었다.
바위의 음영이 더욱 짙어지면서 그것이 갖가지 형태의 귀신상이 되었는데 어둠에 덮이기 직전인 지금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시각이다.
모난 바위를 스치고 지나는 바람은 꼭 귀신이 우는 소리를 냈다.
김영은 바위틈에 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었다.
뒷쪽 나뭇가지에 매어놓은 말이 가끔씩 놀라 말굽으로 잔돌을 찼다.
귀신에는 짐승도 겁내는 모양이었다.
해가 이미 기울었으니 유시도 지난 시각이다. 곰가죽 저고리를 입었지만 드러난 목과 손이 시렸다.
윤의충은 아버지가 불렀기 때문에 오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여종은 이쪽의 눈치를 보았다.
바람에 날린 조그만 돌멩이 하나가 발밑에 떨어졌고 귀신의 비명같은 소리는 더 커졌다.
주위는 더욱 어두워져서 앞쪽의 골짜기도 보이지 않는다. 말이 푸르럭 거리더니 거칠게 뛰었다.
김영은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이재만이 온다는 기별을 받고 그를 피해 말을 끌고 나온 것이다.
여종을 시켜 윤의충을 부른것은 충동적이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낭장에서 일약 두계단을 승급하여 정 4품의 장군 직첩을 받은 그는 곧 이곳을 떠날 것이다.
그가 방호사로 있을 진주목은 천리도 넘는 내륙의 남단이다.
이윽고 김영은 무릎에 볼을 댄채 짧게 울었다. 바람도 울고 귀신도 울고 뒤쪽의 말도 따라 울었다.
이제 귀석골에는 짙은 어둠이 덮여졌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때 아래쪽에서 두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났다.
머리를 든 김영은 칠팔개의 불덩이를 보았다.
"영이 있느냐?"
바람을 타고 들려온 목소리는 오라비 김충이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닦은 김영은 굳어진 다리를 펴고 일어섰다. 겨우 바위를 더듬어 뒤쪽의 말에게로 다가간 그녀는 고삐를 풀었다.
말이 반가운듯 푸르럭 거렸다.
그 순간 앞쪽의 바위가 조금 움직인것 같았지만 어둠속 바람결에 잘못 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