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공화국] 머리를 굴려라 (1)
기사입력 1997년 04월 22일 14시 43분
96년 12월18일. 찬바람이 돌기 시작하는 초겨울. 강남의 한 빌딩을 향해 10여대의 고급 승용차들이 몰려들었다. 낯익은 정계거물, 기업인, 대학교수, 그리고 금융계 실력자들의 얼굴이 보이기도 했다.
`축 개소' `축 발전' 등의 대형 화환들이 빌딩 로비를 꽉 메웠고, 각계 거물들이 화환 속을 헤집으며 식장으로 모였다. 이날은 `사회과학 연구소'가 문을 여는 날이다.
사업가 허원행이 자신의 재산 100억원을 투자하여 설립한 회사로 `비젼지'라는 시사주간지를 발행하게 되며 정당, 사회단체의 의뢰를 받아 연구논문, 혹은 정책논문을 작성하여 제공하는 연구소다.
30∼40대의 젊은 엘리트를 영입하여 연구원으로 위촉했고 정계, 재계에서 은퇴한 거물 몇을 고문으로 위촉하여 자리에 앉혔다. 두 파트로 나뉜 이 연구소는 주간지 발행과 순수한 연구소로 구분되었고, 허원행이 발행인과 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한다.
현수막, 꽃, 축하객들로 분주한 홀 한가운데 검은색 정장의 허원행이 부지런히 돌며 인사를 나누었다.
"감사합니다. 많은 지원 바랍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회과학 연구소'. 말하자면 허원행이 차기정권과 손잡기 위한 징검다리 연구소다.
여야를 막론하고 폭넓게 활동하기 위해 먼저 `시사 주간지'를 발행하기로 하고 편집장을 비롯한 몇몇 엘리트를 스카우트했고, 대학 신문과 재벌사 그룹 사보팀에서 기자들을 뽑아 급하게 자리를 메웠다. 젊은 정치 경제학 전공 대학교수를 초빙하여 연구소에 투입시켰다.
개소식이 끝나고 파티가 시작되었다. 허원행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한 젊은이에게 다가갔다.
"왕림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축하합니다. 허소장, 나 잠깐 봅시다."
그가 허원행의 팔을 잡고 한적한 복도로 나섰다.
"당신 말썽 일으키면 안돼！"
"원 장국장님도. 보시면 모릅니까. 순수한 시사주간지에 정재계에 지원할 두뇌들만 모였습니다."
"사기치고 다니거나 K어른 이름팔고 다니면 죽는줄 알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국장님?"
허원행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전 야당 주요인사들과 친분을 맺을 겁니다. 깊이. 그리고 그 쪽 정보를 훔쳐 국장님께 넘겨 드릴겁니다. 또 영향력있는 인사들에게 두둑한 떡값을 주어 발목을 잡을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제가 어떻게 활약하나. …아마 큰 효자노릇할 겁니다."
"?"
장국장이 놀란 얼굴로 허원행을 바라보았다. 테이프 하나로 단숨에 상류사회로 뛰어 올랐다. 그리고 몇달 사이에 잡지발행인에 정책연구소 소장으로 탈바꿈했다.
`무서운 놈인데. 생각을 달리 해야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