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공화국] 정치음모 (9)
기사입력 1997년 04월 17일 14시 46분
"도대체 날 묶어두고 어쩌자는 거예요." 찢어질 듯한 여인의 발악 소리가 들려왔다. 테이프를 허원행에게 빼앗긴 장혜정의 목소리다. 테이프를 빼앗긴 덕분에 오빠에게 진 3천만원의 빚을 갚을 수 있었고, 금호동의 24평짜리 고급형 아파트와 그랜저 한 대를 선물받았다. 말하자면 허원행은 약속을 충실히 이행한 셈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었다. 하는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무지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외출도 시키지 않고 친구들도 만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갇힌 몸뚱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본능적인 문제 해결은 먹는 것과 자는 것밖에 허락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젊은 여성으로서는 참기 힘든 성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단히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승용차에, 아파트에, 눈부신 가구까지 들여 놓았지만 함께 감상할 남자도, 함께 밤을 즐길 남자도 그녀에게는 없었다. 한달 가까이 얼굴도 보기 힘들던 허원행이 찾아온 날, 장혜정은 이렇게 발악하며 덤벼든 것이다. "이만하면 됐지. 또 뭐가 문제야." 하지만 안다. 여우같은 허원행이 장혜정의 짜증을 모를리 없다. "내가 돌멩이인 줄 아세요. 나가고 싶고 친구도 보고 싶어요. 날 풀어줘요. 직장을 주든가. …이게 뭐예요. 도대체." "심심해?" "심심하죠. 비디오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거야 고급 교도소와 다를게 뭐 있어요. 제발 자유를 주세요." 언제나 그랬다. 처음엔 협박조로 나오지만 시간이 가면 애원조로 바뀐다. 테이프를 빼앗았을 때도 그랬다. 씨익_. 허원행의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왜 웃어요. 난 미칠 지경인데." "할 일이 있어. 오늘밤. …이 집, 자동차, 가구, 공짜가 아냐. 게다가 한달에 300만원씩 생활비 꼬박꼬박 주잖아." "돈만 잔뜩 있으면 뭐해요. 쓰라고 버는게 돈인데." "돈 쓸 시간은 얼마든지 있어. 그건 그렇고 오늘밤 11시 누가 찾아올 거야. 대접 잘해." "네? 밤 11시? 그럼…." "왜. 심심하다며. 굉장한 사람이야. 오늘밤 여기서 주무시고 갈 거니까 최선을 다해. 그래야 너도 빌딩 하나 갖게돼. 1년만 고생하면 평생 먹고 살 준비 해 줄게. 하지만 이 생활 싫으면 나가도 돼. 단, 빈 손으로 나가는 조건이야." "……." "돈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 너도 약속지켜야지." "아… 알았어요." 이미 충분히 교육을 받았다. 허원행의 꿈이 무엇인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이 의견에 동의한 장혜정이다. 그래서 끓어오르는 욕망을 자제하며 한달 세월을 혼자 침대에서 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