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암투 (18)

기사입력 1997년 04월 14일 13시 40분


기대원은 사십대 후반으로 마른 체격의 사내였다. 본관이 개경이고 아비때부터 대를 이어 관노를 재냈는데 어미는 종이었다. 몽골군이 침입해 왔을때 선도역을 자청하여 지름길과 요새의 허실을 알려주었고 숨어있는 백성을 찾아내는데 그는 뛰어난 공적을 세웠다. 더욱이 머리가 영민하여 몽골어를 금방 익힌 덕분에 지휘관의 측근으로 중용되었고 나중에는 쿠빌라이의 어전에 불려졌던 것이다. 쿠빌라이로부터 안동장군겸 해동통령의 직첩을 받은 그는 이미 고려인이 아니었다. 대국의 장군이다. 개경의 주둔군 사령관 왕창국도 그보다 지위가 낮다. 숙소로 삼은 법흥사의 내실에 앉은 기대원은 얼굴에 웃음기가 번져 있었다. 그가 앞에 앉은 이재만을 바라보았다. "듣자니 김시중의 여식과 중랑장이 혼인을 한다던데. 사실이오?" "예. 대감." 이재만이 시선을 내렸다. 흰 피부에 귀공자풍의 용모였고 체구도 크다. "내달에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경사로군. 시중댁과 부친은 사돈이 되겠구려." "……." "하긴 나도 여식이 있다면 중랑장을 사위로 삼고 싶었을거요." 한낮이다. 어제 아침 강화를 떠난 이재만은 조금전에야 이곳에 도착했는데 그는 왕이 보낸 영접사인 것이다. 기대원이 얼굴에 다시 웃음을 띠었다. "우리 대몽골 제국은 곧 남송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할거요. 그런데 고려국은 아직도 대세를 깨닫지 못하고 있어." "……." "중랑장도 명심하시오.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오." "명심 하겠습니다." 이재만이 머리를 숙였다. 인사를 마친 이재만이 방을 나가자 곧 유수병마사 박황이 들어섰다. "대감, 어제 낮에 김준의 첩이 죽었습니다." 다가앉은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측과 내통하고 있던 여자였는데 절에서 나오다가 말에서 떨어져 죽었소이다." "극락왕생을 하겠다." "하오나 대감, 그 여자는 살해된것 같다고 하오." 기대원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말에서 떨어졌다면서?" "김준의 심복으로 윤의충이라는 검객이 있소이다. 도감 수호직으로 낭장이오." "……." "놈이 눈치를 채고 죽였다고 합니다. 머리에 돌이 박혔는데 말에서 떨어지기 전에 놈이 돌을 던진것 같다고 하오." "거란인이 돌을 잘 던지느니." "대감, 놈은 악귀같은 놈이외다." 박황은 개경에서 피바람을 일으켰던 윤의충의 행적을 낱낱이 고했다. 이윽고 그의 말이 그치자 기대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고려에도 인물이 있구나." "낭장 두천도 빼어난 검객이오. 낮게 날으는 제비의 목을 벤적이 있다고 하오." "들었느냐?" 하고 기대원이 물었으므로 박황이 어리둥절 했다. "무엇을 말씀이오?" 그순간 그는 목덜미에 닿는 숨결을 느끼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사지를 굳혔다. 어느새 사내 하나가 등뒤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내의 얼굴은 시체와 같았다. 푸른기가 도는 피부에 흐린 두눈은 마치 썩은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