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암투 (5)
기사입력 1997년 03월 31일 14시 46분
앞쪽 경사가 심한 산비탈을 한필의 말이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말등에 앉은 기수를 바라보던 두천이 말고삐를 당겼다.
산 그림자가 짙게 덮인 저녁이다. 순식간에 비탈을 내려온 말은 곧장 이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윤의충이다.
순식간에 두필의 말이 접근했고 두어칸의 거리에 이르렀을때 제각기 앞발을 치켜 들면서 세워졌다. 말들이 거칠게 투레질을 했다.
시선이 마주친 그들은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윤의충은 가죽조끼 차림으로 등에 장검을 매었다.
"이거 윤랑장 아니시오?"
이윽고 두천이 던지듯 말했다. 놈이 바다를 건너온날 이후 처음 상면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얼굴이다. 그리고 매일이다시피 놈의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런데 이곳엔 무슨일로?"
"대감의 심부름을 가는 길이오."
윤의충의 말은 낮았지만 다 들렸다.
그는 흥분한 말의 목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두천을 바라보았다. 곧은 시선이었고 무표정한 얼굴이다.
"그런데 당신은 이 시간에 어딜 다녀오시는 겁니까?"
"초소를 순시하는 중이오."
두천의 얼굴에 웃음기가 띠어졌다.
"축하 인사가 늦었소이다. 이제 군막에서 자주 뵙게 되겠소."
"잘 부탁하오."
말고삐를 잡아챈 윤의충이 두천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두천도 말에 박차를 넣었다.
놈의 시선에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늪과 같은 눈빛이다.
말이 다시 속력을 냈다. 놈은 개경에서 악귀라고 불렸었다. 소문은 와전되게 마련이지만 놈은 귀신처럼 날아가 피바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쓴웃음을 지은 두천이 다시 박차를 넣었다. 기회는 또 올 것이다. 다음에는 놈의 목에 칼을 박는다.
윤의충이 임연의 사저에 도착 했을 때는 술시 무렵이다. 주위는 어두웠다. 거대한 저택의 사방에는 등불이 매달려 있었다.
임연은 김준과 함께 최의를 죽여 최씨정권을 몰락시킨 공신이다. 대장군겸 추밀원부사로 정3품이었으나 김준 외에는 모두 눈 아래로 보는 거친 인물이었다.
"무슨 일이냐? 이시각에."
임연은 마침 저녁상을 받고 있었다.
마루에 엎드린 윤의충에게 소리치듯 묻고는 고깃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옆에서 여인 하나가 시중을 들었고 넓은 상위에는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대감께서 산삼을 보내셨소이다."
윤의충이 보자기에 쌓인 산삼을 앞으로 내밀자 여인이 다가오더니 임연에게 가져갔다.
"허. 200년은 되었겠다."
보자기를 펴본 임연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그는 벌의 눈에 목청은 승냥이 소리를 내었는데 몸이 민첩하고 힘이 장사였다.
말부리는 군사 출신으로 대장군에 이르렀으니 모두 무신정권의 덕이요 전란이 기회가 된 것이다.
"내가 기력이 쇠하였단 말을 아버님께 괜히 하였다."
임연이 손을 들자 위사장이 다가왔다.
"랑장에게 금 다섯근을 드려라. 아버님께 보내는 답례다."
그의 창고에도 재물이 풍족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