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암투 (2)
기사입력 1997년 03월 28일 15시 47분
다음날 오전. 양덕전에 앉은 왕은 단하에 엎드린 정동보를 내려다 보았다. 정동보는 관복은 갖춰 입었으나 충혈된 눈이 피로에 지쳐 보였다. 풍랑에 밀려 사흘 밤낮을 대해(大海)에 떠있다가 겨우 어젯밤에 강화섬 동단(東端)에 닿았던 것이다. 왕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몽골군사 십여인을 베었단 말이렷다." 정동보가 머리를 들었다. "예, 전하. 양곡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사옵니다." "이제 풍랑이 가라 앉았으니 몽골의 사신이 올터, 추궁이 대단할 것이다." "…." "넘겨 주었어도 되었을 것을." "전하." 정동보가 충혈된 눈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광주목사가 보리죽을 먹으며 모은 세곡이옵니다. 놈들에게 이미 일백여석을 빼앗긴것만 해도 소신이 대죄를 지었소이다." "너는 모른다." 자르듯 말한 왕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작은일로 큰일이 어긋날수가 있으니." "…." "그까짓 양곡 삼백석은 줘도 되었다." 정동보가 머리를 떨구었을때 옥좌의 한단 아래에 앉아있던 김준이 왕을 바라 보았다. "전하." "무엇이오? 시중께선." "중랑장 정동보는 대공(大功)을 세웠소이다. 관작을 올려 장군으로 보하심이 옳을까 하오이다." 순간 양덕전 안은 물벼락을 맞은 듯이 조용해졌다. 숨소리도 나지 않는다. 김준이 똑바로 왕을 바라보았다. "정동보는 목숨을 걸고 영(令)을 지켰소이다. 백성의 살과 피와 같은 세곡을 기어코 전하께 바치려고 했던 충신이오이다." "…." "광주목사 이시헌에게 호부상서를 겸하게 하시고 정동보를 장군으로 보하심이 마땅하다고 아뢰오." 김주의 목소리가 어전을 울렸고 곧 대장군겸 추밀원부사 임연이 나섰다. "지당한 말씀이오. 몽골군이 추궁해 오면 한칼에 베어서 바다에 던지겠소이다." 왕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굳어져 있었다. 임연은 본래 말이 빠른데다 김준을 아비로 삼고 있었으니 맞장구는 당연했다. 그러나 김준이 어전에서 이런식으로 눌러오는 것은 처음이다. 어전에는 이십여명의 고관들이 모여 있었으나 감히 김준을 저지하는 사람은 없다. 이윽고 왕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시헌을 호부상서를 겸하게 하고 중랑장 정동보는 장군에 보하겠소. 곧 직첩을 내리리다." "황공하오이다. 전하." 고관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며 성은에 감사를 표했지만 김준은 머리를 세운채 앉아 있었다.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양덕전을 나갔다. 그러나 고관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시중겸 교정별감 김준이 자리에 앉아있기 때문이다. 이윽고 김준이 정동보를 내려다 보았다. 겨우 머리를 든 정동보는 그와 시선이 닿자 몸을 굳혔다. "수탈 당하느니 목숨을 걸고 싸워라." 김준의 목소리가 전을 울렸다. "내가 살아 있는한 몽골놈의 업신여김은 받지 않을 것이다." "예. 대감." 엎드린 정동보가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목이 메인 까닭으로 다음 말은 떼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