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암투 (1)

기사입력 1997년 03월 27일 15시 09분


침전에 든 왕이 보료에 앉았을때 방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문밖의 마루바닥에 부복한 사내는 별장 강윤소이다. "전하, 개경유수병마사 박황이 보낸자가 왔사옵니다." 왕이 시선을 들었다. 강윤소의 뒤에 납작 엎드려 있는 사내는 등만 보였다. "가까이." 왕의 지시로 사내가 네발로 기어 강윤소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아직 머리를 마루바닥에 붙이고 있다. "머리를 들라." "예. 전하." 서도명이 겨우 아마만을 떼어 왕을 우러러 보았다. "신(臣) 박황의 휘하 교위 서도명이 옵니다." "박황의 밀사라고?" "예. 전하." 이미 강윤소를 시켜 신원을 확인시킨 터이라 왕이 머리를 끄덕였다. "말하라." "예. 전하. 병마사의 정체가 김준이 보낸 밀사에 의하여 노출된것 같사옵니다." "…." "그자는 몽골군에 압송도중 도주 하였사옵고 아직 찾지 못하고 있사와." "그자의 본색은 밝혀 졌으렷다." 왕이 묻자 강윤소가 대답했다. "윤의충이라는 자가 틀림없는것 같사옵니다. 전하, 김준은 그자에게 교위 직첩을 주었습니다." "…." "전하, 박황의 처리가 시급하다고 사료되옵니다. 만일 김준이 알면." "개경에 있는 박황 보다 오히려 내가 시급하게 되었다." 쓴웃음을 지은 왕이 보료에 등을 기댔다. "박황이 배신한 걸 알면 김준은 틀림없이 칼끝을 궁으로 돌릴게야." 왕을 폐위 시키는것 쯤이야 김준의 능력으로 너끈한 일이다. 이윽고 왕이 시선을 들어 서도명을 바라보았다. "만일에 박황에게 강화로 오라는 왕명이 간다면 즉시 왕창국의 진으로 몸을 피하라고 일러라." "예. 전하." 왕이 다시 쓰게 웃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그 왕명은 김준에 의해 강제 되었을 것이란 뜻이다." "예. 전하." 서도명이 뒤로 기어 마루끝으로 사라졌다. 왕이 손을 들어 강윤소를 미닫이 안쪽으로 불렀다. 특전이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강윤소가 다가와 부복했다. 그는 왕궁 내전의 경호를 맡은 위사장이다. 삼십대 초반으로 무예에 능통한 그는 아비가 대장군을 지낸 무반의 가문이었다. 왕이 목소리를 낮췄다. "기대원에게 좌복사(左僕射) 직첩을 줄 작정이다." 그는 길게 숨을 뱉었다. "문관직이지만 김준이 반대 할 것이다. 하지만 기대원을 어쩌지는 못할 것이야." 기대원은 개경의 관노 출신으로 일찍이 몽골에 들어가 지금은 안동장군겸 해동통령이다. 강윤소가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지난번 몽골사신편에 쿠빌라이에게 기대원을 보내줍시사는 요청을 했던 것이다. 이제 왕은 기대원의 보호를 받을 작정이었다. 기대원은 몽골의 고관으로 고려의 정2품 복사를 겸하게 된다. 여몽의 합병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