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악귀상륙 (30)

기사입력 1997년 03월 24일 14시 52분


파도가 세었다. 바위를 때리며 부서지는 물보라가 언덕위에까지 비처럼 쏟아졌다. 바다위를 구르는 파도소리는 마치 기마군단의 말발굽 소리와 같다. 윤의충은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갖가지 색상으로 장식한 말등에 올라 수만명의 기마군을 이끄는 대장을 보았었다. 뒤에는 호위무사 백여기가 따랐고 그뒤를 안장에 북을 매단 고수 수백기가 잇는다. 깃발이 하늘을 덮었고 말발굽으로 땅이 덮였다. 서역으로 출정하는 몽골의 대장군이었다. 이름은 모른다. 어미와 함께 노예로 끌려가던 길이었지만 그 감동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저런 대장이 되어서 아비의 원수를 갚겠다고 그때 생각했었다. 뒤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구광과 만척이다. 이미 어두워 지기 시작하는 유시 무렵이다. 흠뻑 젖은 몸으로 다가온 그들은 옆쪽의 바위 위에 앉았다. "배는 한척도 없소이다. 장군." 만척이 소리치듯 말했다. "그리고 이 바다로 배를 띄울수도 없소이다." 웅포의 용바위에는 이미 몽골군이 진을 쳤고 도제는 간곳이 없다. 몽골군 뿐만이 아니다. 황판의 위사들과 변복한 박황의 부하들까지 해안선을 따라 초병을 세워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륙쪽을 경계하고 있다. 이쪽에서 건너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윤의충이 바다쪽을 바라보았다. 물보라와 어둠에 가려졌지만 활 두바탕 앞쪽이 강화섬의 북단이다. "자시경에 세곡선을 타기로 하자." 소리쳐 말한 그가 일어서자 만척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장군, 세곡선은 남포에 있소이다." "남포로 간다." 남포는 이곳에서 십리 아래쪽으로 내륙과 성을 잇는 유일한 관문이다. 따라서 몽골군의 기찰대가 상주하고 있는데다 첩자가 우글거렸다. 민가도 없고 오직 세곡선이 섬과 내륙을 왕래하면서 양곡과 생필품만 실어 날랐다. 고려왕 원종이 출륙을 약속하자 쿠빌라이가 겨우 열어준 통로인 것이다. 구광이 불쑥 입을 열었다. "물살이 죽은 뒤에 가면 아니되오? 이렇게 물귀신이 난리를 치는날 떠날게 무어요?" "물이 개면 감시가 더 심해질 것이야. 그리고 대감께 시급히 말씀을 올려야 한다." 달래듯 말한 윤의충이 앞장을 섰다. 바람도 세었다. 언덕을 내려와 어둠에 덮인 바닷가를 걷는 그들의 옷자락이 깃발처럼 펄럭였다. "나두 벼슬 줄거요?" 구광의 목소리가 바람에 날렸다. 앞장서 걷던 만척이 어깨를 조금 치켜 올렸는데 뒷모습이라 얼굴 표정은 알 수가 없다. 구광의 목소리가 다시 바람을 탔다. "대정은 싫소. 교위면 몰라두." 그저 훌훌 털고 윤의충을 따라나선 구광이지만 아직 배부른 생활에의 미련이 있었다. 물론 몽골군을 친것은 항몽정신 때문이 아니다. 윤의충에게 끌렸고 그것이 서문까지 따라가게 만들었지만 딱 어떤 계획이 있었던것이 아니었다. 윤의충이 머리를 돌려 구광을 바라보았다. "그래. 대감께 말씀을 올리마. 넌 장군도 될 재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