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악귀상륙 (25)

기사입력 1997년 03월 19일 13시 18분


창고 앞에 서 있는 위사는 전주 출신의 배씨였다. 구광이 다가서자 그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웬일이여?" 그와는 술친구 였으므로 구광이 턱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쥑였나?" "쥑이기는 날이 새면 몽골군 주둔지로 데려갈거여." 닫혀진 문 안쪽에서 말소리가 들리는 것이 안에도 경비병이 꽤있는 모양이다. 구광은 창고의 벽에 기대섰다. "꽤 죽었더만 저놈한테." "말도 말어. 위사장은 말할것도 없고 독을 먹고 열명도 더 죽었어." 배씨가 진저리를 치는 시늉을 했다. "나도 한때 몽골군하고 싸워도 보았고 야적질도 했지만 오늘밤 같은 날은 첨이여." "…." "저놈은 귀신여. 저렇게 날랜 놈은 첨보았어." 황판의 부름을 받고 저택에 들어 온것은 유시경이었다. 내실의 경비를 맡고 있어서 윤의충이 잡힌 후에야 꼴을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구광이 입을 바가지 만큼 벌리고 하품을 했다. "제기 한숨도 못잤네. 저놈 때문에." 몽골군 백인장을 선두로 십여인의 몽골군이 앞을 지나갔다. 아직도 저택안은 살벌한 분위기였다. 화톳불이 곳곳에 놓여 있었고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말이 울었다. 구광이 배씨를 바라보았다. "들어가서 그놈을 구경해도 될까?" "안에 몽골군들이 꽉 찼어." 라며 배씨가 턱으로 문을 가리켰다. "열려있어. 들어가 봐." 창고 안에는 몽골군들이 가득했다. 곧 압송해갈 모양으로 수선거리고 있었는데 고려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몽골군에게 넘겨진 것이다. 구광이 병사들을 비집고 다가서자 십인장 하나가 버럭 소리쳤다. "넌 뭐야！" 얼핏 보아도 여진족이다. 금나라가 멸망한 후로 몽골군은 여진의 장정을 병사로 썼는데 십인장 벼슬이 고작이다. 그러나 몽골족에게는 인간도 재산이다. 십인장이 다가와 그를 올려다 보았고 창고안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난 이댁 마름이오." 더듬거리는 몽골말로 말했을때 옆쪽에서 다른 십인장이 나섰다. "알아. 이자를. 그런데 웬일이냐?" 낯익은 얼굴이다. 그리고 병사 몇명도 안면이 있다. 구광이 웃음을 흘렸다. "구경 왔수다. 귀신놈을." "얼른 보고 나가라. 곧 압송한다." 구광이 윤의충에게로 한걸음 다가섰다. 이미 반듯이 눕혀진 윤의충은 그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옷은 넝마가 된데다가 피투성이었고 머리는 산발이다. 그야말로 악귀같은 형상이었지만 눈빛이 세었다. "구경왔다구?" 귀를 울리는 고려말에 구광은 퍼뜩 머리를 세웠다. 윤의충이다. 입술을 달삭이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말이 똑똑히 들린다. "그래. 실컷 구경하거라." 하고 윤의충이 피범벅이 된 입안을 보이며 웃었다. 몽골군 서너명이 그를 내려다 보았으나 반응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맛살을 찌푸린 구광이 그의 앞에 섰다. 윤의충은 온몸이 쇠사슬로 묶여져 눕혀 있었다. 손끝하나 까딱할수 없는 상황이다. "귀신도 별 수 없구만." 구광이 혼잣 소리처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