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재의연극수첩] 삶의 근원 파헤친 볼만한 연극
기사입력 1997년 03월 16일 14시 49분
극작가 겸 연출가 오태석은 시인같다. 까까머리에 몽당연필을 귀에 꽂고 연출작업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랭보같기도 하도, 가르시아 로르카같기도 하고, 로트레아몽같기도 하다. 그만큼 그의 연극작업은 시적인 상상력과 압축미 그리고 형상미가 빼어나다. 국립극단이 172회 정기공연으로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하고 있는 오태석 작, 연출의 `태(胎)' 역시 그의 문학적인 상상력이 연극적인 압축미로 미학화된 공연이다. `태'는 지난 74년 초연 당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독특한 시간개념과 역사에 대한 화해의 양식을 제시,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작품이다. 이번에 국립극단 단원들과 함께 만들어 선보인 무대는 오태석이 그동안 추구해온 역사의 순환구조, 삶의 근원성을 파헤치고 있다. 세조의 왕위찬탈을 둘러싼 당시 권력핵심부의 음모, 사육신의 지조, 종의 아들을 통해 박팽년의 가계를 이어가게 만드는 화해정신 등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펼쳐진다. 당시 엄정한 계급사회 속에서 하잘 것 없는 하층민의 기지로 한 가족의 대를 잇게 함으로써 `종족의 씨'에 대한 끈질긴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소불위의 권력이 세상을 지탱한다는 힘의 논리가 아니라, 하잘것 없는 민초의 마음이 세상을, 세계를 지탱한다는 서민의 세상을 그려보이고 싶은 것일 게다. 주군(단종)에게 충성을 맹세한 죄로 삼족이 멸하는 화를 입은 사육신의 자손들과 주인의 대를 잇고자 자신의 아이를 희생시켜야 했던 종의 아픔을 어떻게 치유돼야 하는지를 관객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몸 속을 가로질러 흐르는 원한의 강을 풀고, 슬프고도 애처로운 과거의 시간을 해체, 오늘의 삶을 새롭게 꾸며가는 것이 그의 의도인지도 모른다. 세조역의 김재건은 원숙미 풍기는 연기로 극의 중심을 잡아주었으며 문영수 서희승 최상설 이문수 우상전 김종구 최운교 최원석 권복순 등 국립의 배우들은 오태석 연극의 새맛을 보여주었다. 신예 곽명화의 발굴도 눈길을 끈다. 아이카와 마사아키의 깔끔한 조명, 이승무의 독특한 질감의 의상도 인상적이다. 오태석이 오랫동안 추구한 연극 속의 시적 긴장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준 볼만한 연극이다. 휴관없이 20일까지. (02)271－17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