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악귀상륙 (19)
기사입력 1997년 03월 12일 14시 42분
윤의충이 박황의 사저를 나왔을 때는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유시 무렵이었다. 바람이 세었다. 마른땅의 먼지를 훑어가는 바람에서 악취가 풍겼다. 30년 전란으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지경이었다. 들개가 거리를 쏘다니면서 시체를 먹었고 그저 목숨만 지탱해온 백성들도 이제 짐승이 다되었다. 그의 옆으로 서도명이 바짝 따라붙었다. 그는 박황 휘하의 교위로 다부진 체격의 사내였다. 이십대 후반쯤의 나이에 눈매가 매서웠는데 허리에는 일본 검을 찼다. 연전에 왜구를 베고 빼앗았다는 귀물이다. 어둠이 짙어졌다. 그들은 잠자코 빈 자리를 걸었다. 어디선가 아이의 울음소리가 났다가 뚝 그쳤다. "윤교위, 도태일을 베었다니 대단한 솜씨시오." 문득 서도명이 낮게 말했다. "놈은 꽤 쌍검을 잘 다루었소." 서도명은 박황의 심복으로 안내역으로 따라나선 것이다. 윤의충이 대꾸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입을 다물었다. 허물어진 담을 꺾어 돌자 곧 황판의 거처가 앞에 보였다. 횃불이 켜진 사이로 위사 무리가 오갔고 담장 안쪽에서 켜진 등불들로 밤하늘은 자주빛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담장에 몸을 가리고는 저택을 바라보았다. "황판의 침소는 중문을 지난 별채에 있소. 나는 중문 안에까지는 들어가 보지 못했소이다." 서도명이 앞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과 저택의 대문까지는 오십보쯤의 거리였으므로 소리도 들렸다. 저택은 활기에 차 있었다. 주변의 분위기와는 전혀 대조적이다. "위사는 몇명이나 되오?" 윤의충이 묻자 그가 턱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밖에 나와있는 저것들은 위사가 아니오. 힘께나 쓴다는 종들이지. 위사는 안에 있는데 오십인이 넘는 것 같았소." 그는 작년에 박황의 지시로 황판을 만나려고 저택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몽골군들이 조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해주현의 전답을 농민들에게 돌려 달라는 청을 넣었던 것이다. 그러나 황판에게 한마디로 거절당하고 돌아왔다고 했다. "모두 무술의 달인들이오. 요즘 무술 꽤나 한다는 고려인은 대개 야적이 되거나 몽골쪽에 붙습니다." 그가 힐끗 윤의충을 바라보았다. "이미 왕 폐하의 출륙 소문이 퍼져 있어서 저놈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지요." "시중대감이 계시는 한 그렇게 안될거요." 그러나 강화섬 안에 있는 것이다. 산 높고 물 맑은 나머지 땅은 이미 철저히 유린당한 후에 초토가 되었다. 윤의충이 머리를 들었다. "자시 무렵에 내가 단신으로 들어가겠소." "혼자서 말이오?" 눈을 크게 떴던 서도명이 곧 입술만으로 웃었다. "마치 작은 집에라도 가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구려." "단신이 편하오." "무리들의 도움도 받지 않겠단 말이오?" "그렇소." 횃불을 든 사내들이 대문을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소리쳐 이름들을 부르더니 곧 밖의 사내들과 교대를 했다. 제법 정연하게 행동하고 있다. 이윽고 서도명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기다리겠소." 씁쓸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