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악귀상륙 (15)
기사입력 1997년 03월 08일 15시 28분
"네 이놈. 운방현의 구광어른이 누군지 알고 있으렷다."
선뜻 다가선 그가 칼끝을 사내의 목젖에 대었다. 인근은 물론이고 개경바닥에서도 자신을 모르는 백성은 없다.
"감히 이 어른을 비웃어?"
사내가 다시 싱긋 웃었으므로 구광이 숨을 들이마셨다. 놈은 목젖에 닿아 있는 칼끝은 아예 본척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이,잡종놈이."
"네가 황판이 기르는 구광이라는 개새끼로구나."
사내가 낮게 말했지만 구광은 다 들었다. 처음 듣는 욕설이다.
"뭐? 아니,이."
눈이 훌떡 뒤집혔다. 불쑥 칼을 내밀어 사내의 목을 꿰었는데 분명히 놈은 제 자리에 서 있는데도 칼이 가볍다. 헛칼질을 한 것이다.
"이놈."
이제 구광은 야차같은 형상이 되었다. 대도를 긋고 자르고 쪼개며 길길이 뛰었으므로 마른 땅에서는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미련한 놈."
윤의충이 뱉듯이 말한 것은 구광의 칼바람이 십여 번이나 일어나고 난 후였다.
뛰어올랐다가 내려설 참이었으나 숨소리도 흐트러지지 않은 윤의충이다.
"이젠 내 칼을 받아보아라. 이 의 개."
다음 순간 윤의충은 껑충 뛰어오르면서 등에 메었던 칼을 뽑았다.
칼날이 햇살을 받아 번쩍이며 광채를 뿜었고 그 순간 구광은 대도를 옆으로 후려쳤다.
윤의충의 떠오른 허리를 벤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헛칼질이어서 힘이 실린 칼끝을 따라 몸체가 오른쪽으로 비틀려졌다.
`아뿔싸'하고 구강이 느낀 순간 머리끝에서 `지끈'하는 감촉과 함께 육중한 무게가 잠깐 실려졌다가 사라졌다.
"이, 이놈."
이제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구광이 몸을 돌렸다. 윤의충이 자신의 머리를 밟고 뒤쪽으로 돌아간 것이다. 구광이 다시 번쩍 대도를 치켜 올렸을 때이다.
갑자기 얼굴로 무수한 머리칼이 쏟아져 내려왔으므로 그는 대경실색을 했다. 어느 사이에 머리칼이 잘라진 것이다.
"네 머리를 벨 수도 있었다. 개야."
칼을 내려든 윤의충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다시 뛰어오른다면 그렇게 된다. 알았느냐?"
두 손으로 대도를 치켜든 구광이 큰 숨으로 얼굴에 붙은 머리칼을 떼었다. 얼굴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턱 끝에서 눈녹은 물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무릎은 꿇어라."
칼집에 칼을 넣으면서 윤의충이 턱으로 땅바닥을 가리켰다.
"갑자기 널 벨 마음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니 거스르지 마라."
구광이 참으로 어색한 몸짓으로 치켜든 대도를 내렸다. 그리고는 손의 힘을 풀자 대도가 마른 땅 위에 쇳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눈은 부릅떴고 입에서 거친 숨이 뱉어지고 있었다.
산발이 된 머리칼과 어울려 더욱 흉악해진 모습이다.
"무릎은 못꿇겠소."
그가 윤의충을 노려보았다.
"귀신 앞에 무릎을 꿇으면 지옥불에 탄다고 합니다. 그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