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악귀상륙 (14)
기사입력 1997년 03월 07일 14시 27분
구광은 칠척장신에 손발이 커서 고려인으로는 드물게 보는 거인이다. 대개 거물(巨物)은 머리가 둔하거나 행동이 느려서 큰만큼 어느 한쪽이 모자랐는데 구광은 그런 관점에서는 별종이었다.
땅을 울리며 달리는 그를 따를자가 없었고 글을 읽었다. 다만 약점이 있다면 술을 마시면 쓰러질 때까지 마셨는데 그동안에 온갖 사고가 다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난세다. 옥수수로 빚은 술이라지만 구광이 원없이 마실만큼 많지 않았는데 어젯밤은 술 두동이를 마신것이다.
개경에서 온 밀주꾼에게 창고에 쌓아둔 보리쌀 한섬을 주고 바꿨으니 적당한 거래였다. 구광은 두팔을 휘저으며 샛길을 걸었다.
해는 중천에 떠 있었고 날씨는 알맞게 서늘한 사월이다. 그러나 굶주린 백성은 겨우 돋아난 풀싹과 나무순을 따먹으며 아사지경을 헤매는 계절이었다.
구광은 병에게서 배운 노래를 콧김으로 흉내내어 불렀다. 높고 길다가 갑자기 뚝뚝 끊어졌지만 흥미나는 노래였다.
기마병은 이 노래를 부르며 대륙을 정벌해 나갔다고 했다. 산길에는 인적이 없다. 아마 양쪽 산비탈에 흩어져서 풀뿌리를 캐던 백성들은 그를 보고는 숨었을 것이다.
황판의 장원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옥답이었다. 전란 이후로 대부분의 옥답이 폐허가 된것은 병의 살륙과 침탈 때문이다.
농민이 모두 산으로 섬으로 숨자 빈 옥답이 지천으로 널려진 것이다. 그것을 모아 장원을 이룬 황판이다. 황판의 장원은 안전했다. 장원에는 오백여명의 농민이 일을 했는데 그들은 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하루 두끼의 죽을 먹을 수 있었으니 부랑민이 몰려들어 종으로라도 부려달라고 매달리는 상황이었다.
구광의 콧노래가 높아졌다. 지금 운광현의 야별초 감옥에서 나오는 길인 것이다. 기마군사 세명을 인솔한 장교가 몇마디를 하자 야별초의 교위는 아무소리 못하고 감옥에서 그를 꺼내 주었다.
고작해야 십여명 밖에 안되는 야별초 군사들은 단숨에 때려 죽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말썽을 일으키지 말라는 황대감의 분부였다.
구광이 세상에서 제일 두렵게 여기는 존재는 황판 한사람이다. 그가 마악 산모퉁이를 돌았을때 앞쪽의 길가에 한 사내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자신 만큼은 못하지만 큰키에 어깨가 넓고 등에는 장검을 메었다. 그리고 굵은 눈썹 밑의 시선이 강했다. 노래를 뚝 그친 구광이 휘적이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이미 코로 숨을 조절하면서 어깨의 근육을 늘어뜨리고 있다. 그가 사내의 삼보 앞에 멈춰 설때까지 사내의 시선은 비켜나지 않았다. 구광의 가슴이 울꺽 북받쳐왔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네 놈은 누구야?"
구광의 목소리가 산울림이 되었다.
"눈알을 뽑아 먹기전에 눈 돌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구광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사내가 흰이를 드러내며 웃었기 때문이다.
"이 잡종자식이."
구광에게도 잡종자식이 제일 큰 욕이다.
얼굴을 금방 시뻘겋게 붉힌 그는 허리에 찬 대도를 힘차게 빼 들었다. 사지를 토막낼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