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악귀상륙 (12)
기사입력 1997년 03월 05일 13시 45분
다음날 아침. 보리밥 한사발과 소금에 절인 생선으로 윤의충은 아침을 먹었는데 이곳에서는 진수성찬이나 다름이 없다.
골짜기의 굴 곳곳에서 희미하게 밝은 목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아침을 먹는 것이다. 윤의충이 건네준 사금 덕이다.
식사를 마친 윤의충이 물 바가지를 들었을때 거적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장군. 들어가도 되겠소이까?"
만척이다. 윤의충이 대답하자 그가 거적을 걷고 들어섰다. 그리고 그의 뒤를 두 여자가 따르고 있다.
"장군. 이들이 자꾸 보채어서."
한쪽으로 비켜선 만척이 얼굴을 찌푸렸다.
"인사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여자들은 윤의충의 앞에 앉았는데 한 여자가 조금 뒤쪽에 자리잡는다.그러자 윤의충은 그들을 알아보았다. 만석진에서 잡혔다던 아씨와 여종이다.
그들은 이제 해진 베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두사람 모두 머리를 숙이고는 시선을 들지 않았다. 갑자기 어젯밤의 일이 생각난 것이다.
활짝 펴진 자신들의 알몸을 송두리째 보였다. 인간의 심성으로 다가 갈수록 수치심도 더해지는 법이다.
이윽고 앞쪽 여자가 머리를 들었다.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는 청주목의 판관 정시경의 딸입니다. 아비가 연전에 참살 당한 후로 만석진에 숨어 있다가 잡혔습니다."
낮았으나 또렷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장군께서 구해주신 은혜는 백골이 되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하오니 부디 함자를 알려 주옵소서."
윤의충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 이름은 없소."
퍼뜩 시선을 들었던 여자가 다시 눈썹을 깔았다. 윤의충이 때려 붙이듯이 말했다.
"떠돌이 신세로서 고향도 없고 이름도 없는 불한당이오. 장군은 저사람이 지어붙인 직함일 뿐이오."
"소녀 이름은 정진입니다. 부디 기억하여 주소서."
"난 곧 잊소."
자리에서 일어선 윤의충이 그들을 내려다 보았다.
"오늘밤 당신들은 이곳을 빠져나가 로 가게 될것이오. 안내는 저사람이 맡습니다."
윤의충이 턱으로 만척을 가리켰다.
"로 들어가면 이런 일이 없을 것이외다."
굴을 나온 윤의충의 뒤를 만척이 따라 붙었다. 적응력이 강한 것은 오히려 아이들이다. 골짜기의 바위 틈에 서너명의 아이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바위를 들치고 벌레를 찾는 것이다. 골짜기 위쪽의 바위에 걸터앉은 윤의충이 만척을 바라보았다.
"웅포는 폐촌이 되어서 어민도 어선도 없다. 다만 밀정들이 들개처럼 돌아다니고 있을 뿐이지."
그가 말을 이었다.
"웅포에서 오리쯤 위쪽으로 용바위가 있는데 바다쪽으로 굴이 있다. 그곳에 도재라는 자가 살고 있으니 이걸 주어라."
그는 가슴속에서 붉은색 비단 주머니를 꺼내었다.
"그자는 두말않고 배를 내줄것이다."
"장군. 내일 동이 틀때까지는 돌아옵지요."
만척이 두손으로 주머니를 받았다.
"물론 장군의 함자는 목이 잘리더라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