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흥채] 무명설움 8년 '영웅'으로 웃다
기사입력 1997년 03월 04일 15시 26분
95년의 봄날도 어김없이 지고 있었다. 그 봄밤에,4년간 죽도록 사랑했던 여인은 `이제 그만 이별하자고,그럴수 밖에 없지 않느냐?'고 했다. 수화기에 실린 애절한 음성도 그만 그뿐. 봄밤은 애살스럽게 지나가고 있었다. 탤런트 정흥채(鄭興采.34). SBSTV 주말드라마 `임꺽정'의 타이틀롤을 맡아 인구에 회자되는 사내. "그 여인은 시방도 그립다. 가슴 저미도록 사랑했지만...풍문엔 미국에 있다고…." 정흥채는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러나,누군가를 사랑했다는 건 축복받은 거다.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은 수없이 읽었다. 조선조 중기 수탈당하고 핍박받는 하층민들…. 서푼짜리의 가치도 없는 허허로운 세상에서 임꺽정은 영웅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임꺽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 진다." 87년. 정흥채. 그 스물셋의 초상화. 서울 흑석동 소재 극단 `전원'의 연극배우였다. 예나 지금이나 연극배우는 배고프다. 그 때는 더욱 그랬다. "포장마차 주인이었다. 새벽 5시면 영등포 시장에 나가 장을 봤다. 10배 장사는 됐다. 7백원에 산 국수 재료로 5백원짜리 국수 10그릇을 만들었으니…. 밑천을 빼고도 하루 3만원 매상은 됐다. 짭짤했다."그러나 삶은 여전히 고단했다. 새벽에 장을 보고,오전 10시까지 극장 청소를 하고. 그다음 오후 3시까지 리허설. 저녘 7시부터 새벽 3∼4시까지 장사하고. 파김치였다. 잠이 오살나게 그리웠다.
그런데도 신명이 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어느날 저녁. 밥통－포장마차가 없었다. 거금 70만원을 주고 산건데. 황당했다. 그러나 이내 웃고 말았다. `오죽했으면 포장마차를 훔쳐가랴'. 그러나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극단 옆 카페 `타라'의 웨이터가 된다. 시간당 1천원 벌이. 카페는 늘상 북적댔다. 대부분 정흥채의 손님이었다. 스님,연극배우 등 물기어린 사람들. 극단 지하실에서 의자 몇개를 맞대 놓고 잠을 잤다. "8년여 떠돌이였다. 노가다판에도 나가고. 광고회사도 했는데 벌이가 쏠쏠했다. 살만했다. 그런데,늘상 불만이었다. 내 길이 아니었다. 1년도 안돼 때려 치웠다." 극단가를 헤맨다. 뮤지컬 `카르멘 시타'`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들풀의 노래' 그리고 연극 `사제와 제물' 등에 단역으로 뛰었다. 탤런트 정흥채. 극단과 인연을 맺기 전. 군포에 사는 형님집에 기식하며 강남전수회관을 들락댄다. 형이 주는 1천원은 차비,라면한그릇이면 땡이었다. 체면도 안면도 몰수했다. 얼굴에 아예 철판을 깔았다. 봉산탈춤 현대무용 창 사물놀이 판소리 등 닥치는 대로 익혔다. `배우에의 길'을 다졌다. 이게 뒷날 `임꺽정역'을 따게된 결정판이 될 줄이야 관상쟁이도 몰랐다. 95년 7월. 그날 정흥채는 한잔술에 취해 혜화동 뒷골목을 헤매고 있었다. 바로 그때 삐삐가 울렸다. 밤 12시가 지나 있었다. "김한영 PD가 만나자고 했다. 그길로 SBS 제작부로 갔다. 밤 1시30분께였다." 그로부터 두달간 정흥채는 온갖 오디션에 시달린다. 김한영은 정흥채에게 `서울을 벗어나지 말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답답했다. 무슨 역이라고 얘길해줘야 말이지. 뒤에 친구에게서 `임꺽정역'을 내가 맡게됐다는 얘길 듣고,꿈만같았다." 95년. 9월. 드디어 `임꺽정' 촬영에 들어갔다. 무명연극배우 정흥채는 그날 끝내 울고 말았다. "`임꺽정' 오프닝 신을 보면 임꺽정이 다리를 절뚝대며 칼을 들고 눈밭을 걸어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건 대본에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진검(眞劍)을 휘둘다 내 무릎을 벴다. 다리가 못견디게 쑤시고 아렸다. 절뚝댈 수 밖에 없었다. 이게 결과적으로 리얼리티를 더 살렸다는 평을 받았다." 그날 정흥채는 병원에서 여섯바늘을 꿰매야만 했다. 지난해 SBS 연기대상 남자신인상을 그에게 가져다 준 `임꺽정'도 4월초면 막을 내린다. "`임꺽정'은 이미 내 분신이다. 막이 내리면 한동안 너무 허탈할 것이다. 그래서 예술대학원 영상예술과에 입학했다. 또 다른 막이 오를때 까지 못다한 공부에만 몰두하려 한다." 정흥채. 전남 영암 태생. 도포초등학교－도포중－광주 숭일고 졸업. 몇몇 대학에 다니다 그만 뒀다. 키 1m80㎝. 102㎏. 본디 몸무게는 80㎏kg. 임꺽정역을 위해 한때 108 ㎏까지 몸무게를 불리기도 했다. "영화 `노스바스의 추억'에서의 폴뉴먼은 너무 근사했다. 72세인데도 주역배우로 건재하는 할리우드의 풍토가 부럽다." 개량한복을 입고 기자의 인터뷰에 응한 정흥채. 드라마 속의 `임꺽정'과는 달리 인상은 순하디 순했다. 그기다 영암 냄새가 밴 `촌티'는 더없이 정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