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악귀상륙 (9) ♣
기사입력 1997년 03월 02일 16시 14분
신발을 신은채로 방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여자들의 앞에 섰다. 여자들은 대부분 젊었지만 마른 몸매였다. 전란기에 살집이 붙어있는 여자는 극소수의 특권층 뿐이다. 두다리를 조금 벌리고 선 윤의충은 여자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개경 근처에서 이런 물건들을 구할 수는 없고. 모두 지방으로 내려가 잡아온 것들이오." 옆에선 도태일이 턱으로 왼쪽을 가리켰다. "저기 끝쪽에 있는 년은 열여섯이오. 만석진 근처의 산속에서 잡았는데 진품이오." 뒤쪽에서 사내 두어명이 목구멍을 울리며 웃었다. 의미있는 웃음이다. 여자들은 그저 푸줏간의 고깃덩이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가끔씩 다리를 꿈틀거렸고 흔들리는 줄의 반동에 따라 몸을 틀었다. 모두 눈을 뜨고 있었지만 생기가 없다.
"저년은 금화 열닢이고 나머지는 모두 여섯닢으로 드리겠소." 도태일이 손끝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을 그어보였다. "연경에 데려가면 세배 이상의 값어치가 될거요." "여자는 모두 이것들 뿐인가?" 윤의충이 묻자 도태일이 빙긋 웃었다. "난 상품（上品）만 취급하오." "아씨, 조금만 더 견디시어요." 낮고 가는 목소리였지만 방안의 사내들은 다 들었다. 그것은 가운데 매달린 여자가 말한 것이다. 뼈대가 굵고 젖가슴도 큰데다 하체의 숲도 무성한 여자였는데 이젠 몸을 왼쪽으로 틀었다. 만석진 근처의 산속에서 잡았다는 여자를 향해서다. "아씨, 살아서 에 가셔야 합니다. 이 놈에게 팔리면 이 지옥은 벗어나게 될것이오." 도태일이 빙긋 웃었고 사내들은 소리내어 웃었다. 윤의충이 도태일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뭐라고 하는거냐?" "고려를 떠나기 싫다고 했소." 머리를 끄덕인 윤의충이 왼쪽끝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그의 시선에는 초점이 잡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여자가 머리를 들었으므로 서로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늘지고 시달린 얼굴이었다. 그러나 콧날과 입술의 부드러운 곡선이 고왔고 눈이 맑았다. 물기에 젖은 눈이었다. 윤의충은 몸을 돌렸다. "자. 아이들을 보러가자." 아이들은 옆방에 모여져 있었는데 모두 이십여명이었다. 다섯살에서 열살 미만으로 남녀의 비율은 거의 반반이었는데 넓은 방을 가득 메우고 앉아 있었다. 제각기 제법 깨끗한 베옷으로 갈아 입혔지만 우는 아이도 말소리를 내는 아이도 없다. 사십여개의 눈망울이 일제히 윤의충에게 모여졌다. 상황을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도태일이 발끝으로 앞에 앉은 여아의 턱을 치켜 올렸다. "이런건 연경에 가면 금화 열닢 이상을 받습니다. 대인께서도 품고 자 보시면 아침에 개운할 겁니다." "그렇다고 하더군." "모두 스물네명이니 금화 백닢으로 가져가시오. 도중에 다섯명쯤 죽어도 대인께는 큰 이득이 될것이오." 윤의충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다." 방을 나온 윤의충은 섬돌위에 두 다리를 벌리고 섰다. 깊은 밤이었다. 어디선가 들개가 울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