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퇴자] 남산순환도로-북악스카이웨이 '출근' 행렬
기사입력 1997년 02월 26일 15시 09분
`오라는 데도 없지만 갈데도 없다.' 서울 남산 순환도로와 북악 스카이웨이가 명예퇴직자들의 메카로 떠오르고 있다. 차량의 통행이 뜸한데다 인적마저 드물어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받지 않고 재충전을 위한 `혼자만의 공간'을 갖기에 제격이기 때문. 이같은 현상을 반영하듯 최근 이곳에는 오전 일찍부터 승용차가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 한적한 곳에 주차해 놓고 승용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고개숙인 남자'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특히 점심 식사후 달콤한 오수를 즐기기 위해 이곳을 찾는 직장인까지 가세, 수십대의 승용차가 길 옆에 주차돼 있다가 퇴근시간 무렵이 되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서울 남산공원관리사무소의 이영초씨（49）는 "하루 5∼6회 정도 남산 순환도로를 순찰하는데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잠을 청하는 40∼50대 중년 남성들을 자주 본다"며 "이중에는 매일같이 이곳으로 `출근'하는 사람도 적잖다"고 말했다. 이씨는 또 "최근 `명퇴'가 사회 문제로 부각되면서 이런 모습이 부쩍 늘었다"면서 "특히 쏘나타급 이상의 고급 승용차가 많이 늘어난 게 예전과 다른 점"이라고 전했다. 대기업 부장으로 있다가 최근 명예퇴직한 김모씨（48）는 "새로운 사업구상을 위해 남산을 즐겨 찾는데 차안에서 창업 관련 서적을 읽거나 라디오를 들으며 정보를 얻고 있다"며 "지루할 때는 영화관에도 가지만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 까 싶어 가급적 피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말 `불명예퇴직'한 이모씨（43）는 요즘 북악 스카이웨이를 찾는 게 주요 일과의 하나다. 이씨는 "집에 있으면 가족들의 눈치가 보여 평소 출근할 때처럼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이곳을 찾는다. 무슨 사업을 할 까 머리를 굴려보지만 섣불리 뛰어들었다가 퇴직금마저 날릴 까 두려워 신중을 기하고 있다. 당분간 이 생활을 계속할 생각이다"고 말했다.
언제쯤 이곳에서 고개숙인 남자들의 모습이 사라질 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