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악귀상륙 (2)
기사입력 1997년 02월 22일 13시 58분
중문 앞쪽의 천세루는 고려인 송백이 세운 요리집이었으나 손님의 대부분은 몽골군 장교였다. 붉은색 기둥과 교묘한 솜씨의 가구등 내부장식을 남송의 수도 임안에 있는 유명한 음식점 만세루를 본떠 만들었다고 하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천세루는 이층 건물로 다탁이 오십여개에 종업원만 해도 삼십여명이다. 도태일과 그의 일행이 아래층 다탁에 앉자 송간이 다가왔다. 그는 송백의 동생으로 천세루의 관리를 맡고 있었다. "도장군, 오늘은 이르시오." "술 마시는데 이르고 늦고가 없지." 도태일이 화사하게 웃었다. "금엽주를 다섯병만 가져오시오." "과연 도장군이시어." 고려에서 장군이면 무관 계급으로 정4품의 벼슬이다. 문관의 시랑과 동격으로 연 200석의 녹봉을 받는 고관인데 도태일은 장군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도태일이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왜 박기가 늦는거냐?" "아마 재미까지 보는지 모르겠소." 사내 하나가 대답하자 도태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곰 같은놈." 눈이 큰데다 피부가 희고 입술이 붉어서 마치 여장 남자같은 모습의 도태일이다. 그러나 물기에 젖어 번들거리는 시선을 오래 견디는 사람은 드물다. 술과 안주가 날라져 왔으므로 좌석은 금방 활기를 띠었다. 금엽주는 남송에서 들여온 밀수품으로 한병에 은자 세닢이다. 보리 세자루 값이니 한가족이 춘궁기를 벗어 날 수 있는 돈이었다. "자. 황제 폐하를 위하여 만세다." 술잔을 든 도태일이 말하자 모두 잔을 들었다. "만세." 향을 내 품는 미주를 한모금에 들이킨 도태일이 잔을 내려놓았다.그는 상주 출신으로 종의 아들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각지를 떠돌며 무예를 익혔는데 특히 쌍검을 잘썼다. 그러나 그의 운세가 트이기 시작한 것은 일년전에 왕창국을 만나고 나서 부터였다. 여색을 밝히는 왕창국에게 고려소녀 세명을 바친 도태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왕창국의 양자가 되었던 것이다. 몽골 주둔군 사령관의 양자이다. 송간이 도태일을 장군이라고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신분이었다. 천세루의 현관으로 한 사내가 들어서고 있었다. 명주 겉옷에 소가죽 조끼를 입고 다리에는 가죽 다리싸개를 한 몽골인 차림이다. 육척 장신으로 짙은 눈썹밑의 눈을 굴려 안을 둘러본 그는 곧 도태일의 옆쪽 다탁으로 다가와 앉았다. 사내들이 약속이나 한듯이 말을 멈췄다. 처음보는 사내였고 더욱이 몽골인이다. 허리에 찬 검도 몽골인이 즐겨쓰는 끝이 휜 장검이었다. "자. 고려왕의 출륙을 위하여 천세다." 사내들이 술잔을 들었다. "천세." 쿠빌라이가 만세면 당연히 고려왕은 천세다. 그순간 도태일은 옆쪽 사내의 시선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칼끝이 그어져 가는듯한 시선이었다. 그가 마악 잔을 내려 놓았을때 사내 한명이 서두르며 천세루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곧장 도태일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장군. 야단났습니다." 눈을 치켜뜬 그는 숨을 가다듬었다. "박기의 목이 없어졌습니다. 예. 목이 잘렸단 말씀입니다."